[세계의 눈/제라르 뱅데]‘닫힌 민주주의’의 위기

  • 입력 2006년 9월 29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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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는 나치즘, 스탈린주의, 마오쩌둥주의 같은 전체주의의 시대였다. 냉전이 끝나면서 민주주의가 전체주의에 승리를 거뒀다. 그 뒤로 민주주의를 앞지르는 모델이 더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민주주의의 독주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패러독스가 발생했다. 더는 적수가 없는 것이 확인된 순간 민주주의가 반(反)민주적인 모습을 띠기 시작한 것이다.

투표 참여율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는 점을 예로 들 수 있다. 프랑스에서는 이제 유권자의 3분의 1이 아예 투표를 하지 않는다. 영국에서도 최근 선거를 보면 기권자가 40% 정도에 이른다. 민주주의는 국민 모두의 참여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말이다.

민주주의가 성공한 시기에 왜 민주주의는 잘못 작동하기 시작하는가. 우선 ‘세계화의 여파’로 볼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우리는 경제, 무역,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세계를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제 세계 기준에 맞춰 일한다. 인터넷은 국경을 넘는 정보 교환을 가능하게 했다. 그 결과 세계화는 ‘국가’를 파괴했다. 국가 단위의 사안에 국민의 참여도가 점점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극단적인 개인주의도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요소다. 혼자서도 얼마든지 생활이 가능한 시대가 됐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제 특정 그룹에 속할 필요가 없어졌다. 특히 정치단체는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다.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진 또 다른 근원을 찾기 위해선 민주주의를 정의하는 기초에 질문을 던져 볼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는 원래 사람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열린 시스템이다. 그런데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는 점점 닫힌 시스템으로 변하고 있다. 국가가 반드시 구성원 대다수가 바라는 방향대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이 때문에 유권자는 정치 참여에 흥미를 잃고 있다.

유권자가 흥미를 잃음에 따라 민주주의의 토대까지 변질되고 있다. ‘유권자-선출된 대표’의 조합에 기초를 뒀던 민주주의는 이제 ‘선출된 대표-전문가’ 커플에 더욱 의존하고 있다. 더군다나 각 분야의 문제들이 갈수록 복잡해짐에 따라 전문가들의 역할은 더 커지는 중이다. 이제는 상당히 많은 정치적 결정이 전문가들의 의견에 좌우된다.

유럽연합(EU)이 좋은 사례다. 유럽의회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종합적으로 모이는 장소로 바뀌고 있다. 만약 어느 유럽의회 의원에게 물어본다면 누구건 이렇게 고백할 것이다. “전문가 집단이 내놓는 그 많은 서류를 모두 읽을 수 없다.” 그만큼 정치에 미치는 전문가 집단의 입김은 세졌다. 유권자들이 관심을 잃고 빠진 자리를 전문가가 채워 가는 형국이다.

전문가들의 개입과 영향력을 잘 보여 주는 사례로는 유럽헌법 비준 과정을 들 수 있다. 우선 200쪽에 이르는 헌법 조항을 전문가들이 만들었다. 각국은 이를 국민에게 제대로 알리지도 않은 상태에서 국민투표에 부쳤다. 몇몇 나라에서 유권자들이 ‘반대’에 표를 던진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은 거부당한 유럽헌법을 되살리기 위해 전문가 집단이 ‘플랜B’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찬성’이 나올 때까지 협상과 수정이 계속될지 모른다.

이는 한편으로는 민주주의의 변화된 양상을 잘 보여 주는 사례다. 오늘날 투표는 특정한 결정을 위해 국민의 뜻을 모으는 과정이라기보다는 이미 결정된 사안을 적용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 버렸다.

권력의 큰 부분은 이제 전문가 집단의 손에 넘어갔으며 민주주의는 닫힌 시스템이 돼 버렸다. 민주주의의 위기다. 21세기, 민주주의는 계속 살아남느냐 아니면 자멸하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

제라르 뱅데 에뒤프랑스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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