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진타오와 후야오방 각별한 관계에 관심

  • 입력 2005년 9월 8일 03시 03분


‘은인에 대한 보은일까.’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이 이끄는 중국 정부가 후야오방(胡耀邦) 전 중국 공산당 총서기의 복권을 결정한 이후 후 주석과 후 전 총서기의 ‘각별한 관계’가 관심을 끌고 있다.

후 주석은 후 전 총서기의 후원을 받아 정치인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번 복권 결정에 대해 1970, 80년대 개혁파의 대부인 후 전 총서기의 정치적 자산을 활용해 지식층의 지지를 이끌어내고 서방과 국내의 민주화 요구를 무마하는 카드로 쓰려는 ‘정치적 술수’란 분석도 나온다.

하지만 4000만 위안(약 50억 원)이나 들여 후 전 총서기에 대한 복권 행사를 대대적으로 치르는 것은 정치적 은인에 대한 부채 의식을 엿보게 하는 대목.

후 주석이 후 전 총서기와 처음 알게 된 것은 1981년. 당시 39세이던 후 주석이 간쑤(甘肅) 성 서기 직에서 물러나 중앙 당교에 입교해 교육을 받을 때 같은 방을 쓰던 친구가 후야오방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후진타오는 이듬해 후야오방의 천거로 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 중앙위원회 서기가 됐고 이후 전국청년연맹 제6기 주석을 거쳐 1984년 공청단 중앙위원회 제1서기에 임명됐다.

후 전 총서기의 ‘보살핌’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중국 혁명원로 자제들이 주축인 ‘태자당(太子黨)’의 반발로 좌절되긴 했으나 1985년 후진타오를 공청단의 요직인 조직부장에 앉히려 했던 것.

이 사건으로 후진타오는 한직인 구이저우(貴州) 성 당서기로 옮겨갔지만 이는 전화위복이 됐다. 후 전 총서기가 1986년 대규모 학생시위의 여파로 이듬해 1월 실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후 전 총서기는 후 주석이 중국의 최고 지도자에 오르기까지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데 후원자 역할을 했으며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는 데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셈이다.

베이징=황유성 특파원 ys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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