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2기… 美 '종교적 보수주의' 목소리 드높다

  • 입력 2005년 1월 25일 17시 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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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미국에서는 2개의 커다란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낙태에 대한 찬성과 반대 논란이 하나이고, 진화론과 창조론에 대한 논란이 또 하나다. 두 논란 모두 낙태 반대와 창조론을 지지하는 보수주의자의 공세로 시작됐다. 지난해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상당수 유권자들이 예상 밖으로 ‘도덕적 가치’를 후보 선택의 기준으로 삼았다고 대답하면서 예고된 현상이기도 하다. 이에 힘입어 조지 W 부시 2기 행정부가 출범하자마자 낙태 합법화 판결을 뒤집어야 하고, 초월자의 섭리에 따라 인간이 탄생했다는 ‘지적설계론(Intelligent Design)’을 학교에서 교육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급속히 미국 사회에서 힘을 얻고 있다. 》

▼“낙태 금지하라”▼

부시 대통령 스스로도 낙태 반대 시위에 지지를 표명하는 등 ‘종교적 보수주의’의 상징으로 투영되고 있어 논란을 더하고 있다.

낙태 합법화 판결 32주년을 맞은 24일 미국 사회에 낙태 논란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낙태 반대 시위대 수백 명은 이날 워싱턴 연방 대법원 청사 앞에서 “태아의 생명을 빼앗는 비도덕적인 낙태를 즉각 불법화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위는 부시 대통령이 중간에 전화를 걸어와 “생명 중시 문화를 만들어 가자”며 시위대에 지지를 표시하자 더욱 힘을 얻으면서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부시 대통령은 확성기를 통해 중계된 전화 발언에서 “낙태 불법화는 당장 실현하기는 어려운 과제지만 멀리서나마 (낙태 금지 법제화 가능성의) 반짝거림이 보인다”고 말해 시위대의 환호를 이끌어 냈다.

부시 대통령은 지난해 남부 뉴멕시코 주에서도 낙태 반대 시위대에 전화를 걸어 지지 의사를 밝혔다. 20일 취임사에서는 “원치 않는 존재도 가치가 있다”는 비유적 표현으로 낙태에 반대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시위에 참가한 가톨릭 워싱턴 교구 대주교 시어도어 매카릭 추기경은 “오늘은 역사의 중요한 순간”이라며 “많은 젊은이들이 반(反)낙태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만큼 낙태 금지 문제가 희망적”이라고 말했다.

낙태 반대론자는 1973년 연방대법원이 “여성의 낙태할 권리가 헌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며 낙태를 합법화한 1월 24일 연례적으로 워싱턴 도심에서 대법원 청사 앞까지 ‘생명의 행진’이라는 이름으로 가두시위를 벌여 왔다.

보수파의 낙태 반대 운동은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둬 이날 연방대법원은 낙태 반대 구호인 ‘생명을 선택하라(Choose Life)’라는 자동차 번호판 발급이 위헌인지 아닌지를 심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주가 운전자들이 70달러만 내면 낙태 반대 구호가 적힌 번호판을 발급해 주면서 낙태 옹호를 주장하는 구호가 적힌 번호판은 발급하지 않는 데 대해 개입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미국 제4순회 항소법원은 낙태 옹호자들에게 맞는 내용의 번호판을 제공하지 않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조치는 제1차 수정헌법에 위배된다고 판결한 바 있다.

최근 미 전역에서 산발적으로 계속되는 낙태 불법화 시위는 부시 대통령이 재선돼 중요한 사회적 쟁점으로 떠오를 것이라고 미 언론은 보고 있다.

종신제인 연방대법원 판사 9명 가운데 4명이 암 투병 경력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부시 대통령의 4년 임기 동안 진보성향의 판사가 은퇴하면 낙태 반대론자를 대법관으로 임명해 판례를 뒤집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대법원은 보수파와 진보파가 5 대 4로 구성돼 있다. 특정 법률의 위헌결정을 하려면 대법관 6명의 동의가 필요하다.


워싱턴=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창조론 교육을”▼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는 각각 24일과 23일자 사설을 통해 “공립학교에서 확립된 과학 이론인 진화론의 대안으로 과학이 아닌 지적설계론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지적설계론을 과학 시간에 가르치는 것은 미국 헌법이 정하고 있는 정교(政敎) 분리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두 신문의 사설은 부시 대통령의 재선을 계기로 일고 있는 미국 사회와 법조계의 보수화 경향을 염두에 둔 것으로 풀이된다.

지적설계론은 생물계가 너무 복잡해 인간이 진화의 결과로 탄생했다고 볼 수 없고 지적인 힘을 가진 초월자가 창조에 개입했음이 틀림없다는 이론.

1991년 법학자 필립 존슨이 ‘심판대에 선 다윈(Darwin on Trial)’이란 책을 통해 널리 확산시킨 주장이다. 유일신이나 종교를 끌어들이지 않고 진화론을 비판해 창조론자들에게 진화론에 대한 반박논리로 각광을 받아 왔다.

특히 1987년 미국 대법원이 루이지애나 주의 교과과정에 관한 판결문에서 “과학 교과과정을 재조정해서 특정한 종교적 관점과 일치하도록 할 수 없다. 루이지애나 주는 창조론을 과학 교과과정에 편입시킬 수 없다”고 판결한 뒤 마땅한 대안을 찾지 못해 수세에 몰렸던 기독교 창조론자들은 ‘지적설계론’에 환호를 보냈다.

지적설계론이 다시 이슈화한 것은 지난해 말 펜실베이니아 주 도버의 한 학교위원회가 과학시간에 지적설계론을 진화론과 함께 가르치기로 결정하면서부터.

시민단체인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은 학부모들을 대리해 연방법원에 이를 금지해 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도버 학교위원회 변호사들은 “지적설계론은 종교가 아니므로 정교 분리 조항에 근거한 1987년 판결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ACLU 측은 “지적설계론에서 말하는 초월자가 하느님이 아니라면 외계인이란 말이냐”며 교육금지 가처분판결을 신청했으나 패소하고 말았다.

이에 고무돼 캔자스와 위스콘신 주 교육위원들도 올해 안에 지적설계론을 지지하는 소송을 내겠다는 뜻을 밝혔다. 조지아 주의 한 카운티 교육위원회는 과학 교과서에 ‘진화론은 사실이 아니라 이론일 뿐이다’라는 스티커를 붙였다가 법원으로부터 스티커 제거 명령을 받자 항소하기로 하는 등 논란이 점차 거세지고 있다.

마침 최근 CBS 방송의 여론조사에서 미국인의 55%, 부시 대통령에게 투표한 사람들의 67%가 진화론을 전혀 믿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또 갤럽 여론조사에서는 미국인의 3분의 1이 성경이 글자 그대로 진실이라고 믿는 것으로 나타났다.

박혜윤 기자 parkhy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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