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방형남/미국비자

  • 입력 2002년 5월 16일 18시 49분


유럽여행을 하다보면 국경을 그려놓고 내 나라, 네 나라 하면서 사는 것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든다. 유럽연합(EU) 12개 회원국들이 단일화폐인 유로를 사용하는 데다 국경 통과 또한 자유롭기 때문이다. 자동차를 이용하면 언제 국경을 통과했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나라로 넘어간다. 한국인도 일단 유럽에 도착하면 이동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대부분의 유럽국가와 맺은 사증(비자)면제협정 덕분이다. 여권에 기념 삼아 스탬프라도 받으려면 일부러 부탁을 해야 한다.

▷해외여행을 하는 자국민을 편하게 하기 위해 비자면제협정을 체결하는 국가들이 크게 늘고 있다. 우리나라도 71개국과 면제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다 보니 비자가 필요한 국가의 방문은 상대적으로 번거롭고 귀찮다. 그 중에서도 미국이 비자 발급에 가장 까다로운 나라로 꼽힌다. 9·11 테러 후 외국인의 출입국을 옥죄더니 얼마 전 지문 날인과 홍채 촬영까지 요구하겠다는 법안을 만들었다. 특히 “미국에 오는 사람들이 누구이며, 왜 오는지, 와서 무엇을 하고 언제 떠나는지 알아야 한다”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발언은 외국인을 잠재적 범법자로 보는 것 같아 불쾌하다.

▷미국이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대상에는 한국인이 포함된다. 서유럽의 대부분과 일본 등 29개국 국민은 단기체류 때 비자발급을 면제받지만 한국인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서울 주한미국대사관에 늘어선 비자 신청자의 줄이 더욱 길어지고 99년 현재 8.2%나 되는 비자거부율이 더욱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지 않아도 주한미대사관은 3월 이미 36개나 되는 질문이 나열된 비자신청양식에 군 경력을 포함한 18개의 질문을 추가해 한국인을 화나게 했다. 국제범죄조직은 미국 비자가 붙은 한국여권을 최고 2만달러에 거래하고 있다는데 여권도난도 더욱 늘어날 것 같아 걱정이다.

▷미국은 한국인이 많이 찾는 나라다. 지난해만 해도 해외여행자의 11.6%가 미국을 방문했다. 미국의 경직된 태도는 분명 한국 여행자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지문을 찍고 홍채 사진까지 준비해야 할 바에야 미국에는 가지 않겠다”고 흥분하는 사람이 나올 만하다. 여행을 자유롭게 하는 세계적 추세를 거스르고 인권 침해 논란까지 부를 수 있는 강경한 비자정책에 반발해 미국 여행을 포기하는 사람이 다른 나라에는 왜 없겠는가.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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