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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0년 10월 3일 18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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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일 오후 5시 라이프치히 중앙역 로비.
갑자기 터져나온 고함으로 역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키가 2m는 돼 보이는 청바지 차림의 10대 청소년 3명이 굳은 표정으로 기자에게 다가와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주위 사람들이 기자를 에워싸자 이들은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만약 대낮 공공 장소가 아닌 한밤중의 외딴 골목이었다면…. 등골이 오싹해지는 순간이었다. 말로만 듣던 동독지역 청소년들의 반외국인 정서가 몸으로 느껴졌다.
동독 지역을 중심으로 발생하고 있는 외국인 테러사건은 외신을 통해 바깥으로 알려지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라이프치히 시내 서점에서 일하는 크리스티안 뮐러(19)는 “친구 중 대부분이 일자리를 찾지 못하면서 외국인에 대한 적대감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음식점을 경영하는 킨더 바우만(64)도 “최근 1∼2년 동안 과거 독일통일 직후처럼 외국인 폭력사건이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다”며 “이는 과거 나치시대의 반유대인 운동에 버금가는 사건”이라고 우려했다.
독일 언론에 따르면 외국인 상점에 쓰레기를 버리거나 낙서하는 소극적인 폭력에서부터 물건을 훔치고 폭력을 행사하는 적극적인 사례까지 하루 평균 300여건의 크고 작은 외국인 폭력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독일 통계청은 지난해 발생한 14만 건의 폭력사건 중 1만2000건이 외국인과 관련된 것으로 발표했다.
베를린의 버스 안에서 만난 팔레스타인인 모하마드 하산(27)은 눈에 띄는 검은 피부 때문에 늘 불안한 마음으로 생활하고 있다. 전쟁을 피해 95년 독일에 난민신청을 한 그는 난민촌이 있는 동독의 항구도시 로스토크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제한돼 있다. 그는 그러나 “매일 저녁 6시가 되면 로스토크는 나 같은 외국인들에게는 생지옥으로 변했다. 대낮에 카페에서 청년 3명으로부터 마구 두들겨 맞은 뒤 생명의 위협을 느껴 지난해 베를린으로 와 불법체류를 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지난주 라이프치히에서는 골목을 걷던 흑인이 10대 소년이 휘두른 야구방망이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노이뮌스터와 지크부르크에서도 극우파 청년들의 시위가 격화되자 생명의 위협을 느낀 흑인과 아시아인의 탈출이 이어지고 있다.
독일 재산청 라인홀트 아놀디 국장(39)은 “동독정권 당시 권위주의 체제에 길들여졌거나 외국인과 접촉이 없는 사람일수록 극우파에 쉽게 동조하는 경향이 있다” 말한다.
실제로 실업률이 높은 마그데부르크, 로스토크, 브란덴부르크 등 동독지역의 중소도시가 극우파 폭력의 온상이다. 독일정부는 ‘피와 명예’ 등 독일 내 산재한 극우단체의 해체를 지시했지만 외국인 폭력은 좀처럼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지난달 슐레스비히 홀슈타인주의 하이데 지모니스 총리가 극우파 폭력 근절을 위해 각 정당의 연대를 제안하면서 동독 지역 5개 연방주에서는 관련법 제정을 서두르고 있다.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지는 “2차대전 직후 히틀러 정권을 지지했던 언론인들은 모두 쫓겨난 반면 동독 독재정권의 나팔수 노릇을 했던 언론인들이 통일 이후에도 자리를 지키면서 반외국인 정서에 불을 지피고 있다”고 비판했다.
통일 10년을 지나면서 동서독 지역을 가로막고 있던 동서독 주민간의 ‘마음의 빙벽’은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다. 하지만 그 틈새를 ‘인종의 장벽’이라는 괴물이 빠른 속도로 비집고 들어서는 것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만하다.
<라이프치히〓백경학기자>stern100@donga.com
▼볼터 공보처 동독국장 인터뷰▼
동독 지역의 극우파 폭력 문제가 독일 사회의 현안으로 떠오르면서 독일 공보처 내 동독지역담당국은 쉴 틈 없이 바빠졌다. 구동독 지역인 5개 신연방주로부터 들어오는 각종 정보를 여기서 파악하고 관계 부처와 협의해 대책을 발표한다. 요헨 볼터국장(51)은 “극우파 폭력은 동서독 주민간 소득 격차가 해소되는 2010년이면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내다봤다.
―왜 동독 지역에서 극우파 문제가 유독 심각한가.
“경제적인 이유와 심리적인 이유가 있다. 지난 10년간 소득 격차가 좁혀지면서 동독 주민들도 이제 서독주민의 87.5% 수준의 임금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동독 지역 중 경제적으로 소외됐거나 자본주의에 적응하지 못한 주민들이 주로 극우파에 이용당하고 있다.”
―극우파가 기승을 부리는 지역의 특징은….
“서독기업의 투자가 거의 없거나 낙후된 지역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대도시보다는 소도시, 서독인접 지역보다는 내륙 지역, 과거 동독 공산당 체제의 전통이 강한 지역들이다.”
―극우파에 대한 정부 대책은 뭔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동서독 주민간의 교류다. 정부는 이해를 돕기 위해 도시간 자매결연과 주민들의 상호 방문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지금까지 들어간 통일 비용은 어느 정도인가.
“1990년 통일 이후 98년까지 매년 평균 1500억마르크(약75조원) 정도가 투입됐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400억마르크로 축소됐다. 정부는 동독도 이제 어느 정도 지역 경제가 활성화됐다고 믿고 있다.”
―동독 주민들은 오히려 지원을 늘려야 한다는 입장인데….
“10년은 체제를 변화시키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문제는 통일 비용의 액수가 아니라 어떻게 이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느냐 하는 것이다.”
볼터 국장은 “독일 국민에게 통일은 하나의 놀라운 선물이었다. 그것을 무엇으로 채우느냐가 문제”라며 말을 맺었다.
<백경학기자>stern10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