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노체트의 앞날은]'反인륜범죄' 칠레 법정에 설까

  • 입력 2000년 3월 2일 23시 18분


반인류 범죄 처벌이 먼저냐, 죽어가는 한 인간의 인권이 먼저냐.

영국 정부는 장고 끝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전칠레대통령을 석방해 귀국케 함으로써 재판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악화된 피노체트의 건강문제가 반인류 범죄의 단죄보다 더욱 시급하다는 ‘지극히 인도적인’ 선택을 했다. 영국은 1997년 독일 출신 나치 전범 혐의자 시즈몬 세라피노비츠(85)가 건강이 나쁘다는 이유로 기소를 포기하기도 했다.

실제로 피노체트는 장기간의 구금으로 인해 건강이 상당히 악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BBC방송 등은 최근 의료 검진기록을 인용, “피노체트는 뇌의 전두엽과 측두엽이 손상돼 기억력이 감퇴됐으며 당뇨성 신경증과 진행성 뇌혈관 손상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여기에 칠레는 과거 영국과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 전쟁을 벌였을 때도 남미에서 유일하게 영국을 지지한 우방이라는 정치적 배경도 적지 않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칠레 정부는 양국의 이같은 관계를 들이대며 피노체트를 석방하지 않을 경우 영국으로부터 무기 수입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뜨거운 감자’ 피노체트를 털어내기는 했으나 영국은 두고두고 반인류 범죄의 응징이라는 국제적 추세를 외면했다는 비난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전범 인권유린 등 반인류 범죄를 저지른 자에 대한 처벌은 시효도 국경도 없다는 것이 최근의 국제 조류이기 때문이다.

피노체트가 비록 영국의 손에서 벗어나기는 했으나 칠레에서 처벌받을 가능성은 아직 남아 있다. 칠레 정부는 그동안 칠레 국민은 칠레 정부가 처벌해야 한다며 주권론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11일 취임할 예정인 리카르도 라고스 신임 칠레 대통령은 1월말 당선 직후 “피노체트의 독재 기간 중 인권 침해가 일어났고 정권 차원의 범죄가 저질러졌다”며 “누구든지 칠레의 법원에서 재판을 받을 수 있다”고 밝혔다.

올해 27년만에 사회주의 정권이 등장한 칠레에서는 피노체트를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어느 때보다 높다. 그러나 피노체트를 지지하는 우파 세력이 여전한데다 새 정권 취임을 앞둔 미묘한 시점이어서 피노체트를 맞이한 칠레 국민이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 따라 정권의 대응이 달라질 수도 있다.

피노체트의 처벌 여부와 관계없이 외국의 국가원수를 지낸 그를 체포하려 했던 발타사르 가르손 스페인 판사의 ‘용기 있는’ 행동은 국제사회의 큰 성원을 받았다. 반대자를 탄압하기 위해 서슴없이 인권유린 등을 자행했던 각국 독재자들도 처벌을 두려워하며 여생을 보내야 하는 상황이 됐다.

<권기태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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