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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8년 10월 13일 19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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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고연방의 다윗은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대통령(57). 그는 ‘대(大) 세르비아 건설’을 내세워 민족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전략으로 코소보를 세르비아의 일원으로 유지하려 하고 있다.
그가 미국과 NATO의 공습위협에 굴복해 마침내 코소보로부터 철군하겠다고 물러섰으나 국제사회는 코소보에 대한 그의 질긴 집착을 알기 때문에 여전히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코소보를 둘러싼 알바니아인과 세르비아인의 민족갈등은 ‘능력있지만 평범한 관료’였던 밀로셰비치를 ‘카리스마를 갖춘 민족지도자’로 탈바꿈시킨 결정적 배경이었다.
41년 베오그라드 인근 포자레바츠에서 출생한 그는 전력회사와 은행에 잠시 몸담았다가 39세때 정계에 투신해 80년 요시프 브로즈 티토대통령이 사망하면서 실력자로 부상, 86년 세르비아 공산당수가 됐다. 그는 89년 세르비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서 “코소보는 영원히 세르비아인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코소보가 4백여년전 세르비아의 10만대군이 오스만 터키군에 전멸당한 ‘성지(聖地)’임을 강조함으로써 세르비아인의 민족감정에 불을 지폈다. 대통령이 되자 그는 가장 먼저 코소보의 자치권을 빼앗았다.
92년 유고연방이 해체됐으나 밀로셰비치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내전과 크로아티아 내전에 개입, 각 지역의 세르비아인에게 무기를 지원하는 등 ‘대 세르비아’ 정책을 꾸준히 실천에 옮겼다. 그는 특유의 끈질김과 노련함으로 계속되는 국제사회의 압력을 견뎌냈다. 내전과 NATO의 보스니아 공습, 유엔의 제재로 경제가 어려워지자 그는 95년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와 관계를 단절하고 정치적 위기에서 벗어났다.
밀로셰비치는 지난해 신유고연방 대통령 당선을 계기로 올해초부터 코소보 알바니아계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시작했다. 그는 코소보개입에 대해 “이기지 못할 싸움이면 시작하지 않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강수진기자〉sjk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