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97]장쩌민 中국가주석

  • 입력 1997년 12월 29일 20시 20분


『…덩동지가 없었다면 오늘 중국에는 새 생활도, 개혁개방의 새 물결도 없었을 것이다… 덩샤오핑이여, 영원하라―』 2월25일 중국 인민대회당. 장쩌민(江澤民·71) 국가주석은 떨리는 목소리로 덩샤오핑(鄧小平)에 대한 추도사를 읽어내려갔다. 굵은 테 안경 너머로 한줄기 눈물이 흘렀다. 예기치 못한 죽음도 아니었지만 20여년간 중국을 이끌어 온 「작은 거인」의 사망으로 중국은 급작스런 역사의 소용돌이속에 휩쓸려 들어갔다. 그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장쩌민이 있었다.7개월 후.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공산당 제15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국의 향후 권력구조를 가늠케 하는 중앙위원명단이 발표됐다. 정계거물 차오스(喬石)와 그 파벌의 실각, 군부내 실력자 양바이빙(楊白빙)제거, 장쩌민의 측근 상하이방(上海幇)의 득세…. 덩의 그늘 아래에서 늘 「2인자」일 수밖에 없었던 장쩌민이 마침내 명실상부한 1인자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장쩌민은 흔히 「호호선생(好好先生)」으로 불린다. 사람 좋아보이는 호인같은 인상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그러나 호락호락한 별명과는 달리 그는 강한 추진력과 주도면밀함으로 권력의 천하통일을 이룩, 97년을 자신의 「생애 최고의 해」로 만들어냈다. 「포스트 덩」으로서 국내의 정치적 기틀을 다진 그는 대외로 눈을 돌려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펴나갔다. 10월말 중국 국가원수로서는 12년만에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 빌 클린턴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고 러시아 옐친 대통령을 초청해 양국간 전략적 동반자관계를 모색했다. 21세기에 중국을 아시아지역의 주도국가로, 나아가 세계강대국의 하나로 반석위에 올려놓기 위한 기반마련에 나선 것이다. 「일국양제(一國兩制)」라는 자신의 구상이 실현되는 것을 끝내 보지 못한 덩과 달리 장쩌민은 「금세기 최대 이벤트」로 꼽혔던 역사적인 홍콩반환식에 참석, 중국땅에서 영국제국주의를 청산하고 99년만에 「동양의 진주」를 돌려받는 주인공이 됐다. 그가 덩샤오핑 만큼 절대적인 지도자가 될 수 있을지는 아직 판단하기 이르다. 그러나 그에게 「시대의 운」이 따르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끝― 〈강수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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