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국극복 지도자/콜 獨총리]신념으로 통일 주도

  • 입력 1997년 12월 2일 20시 03분


89년 11월 9일, 헬무트 콜 당시 서독총리는 독일과 폴란드총리와 44년만의 정상회담을 하기 위해 바르샤바에 도착했다. 그날 저녁 베를린장벽 개방소식을 전해 들었다. 콜총리는 충격을 받았다. 그리곤 『지금 세계사가 기록된다. 나는 통일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할 것이다』라면서 비상각의 소집을 명령한뒤 일정을 취소하고 급거 귀국했다. 갑자기 그리고 우연히 닥친 위기이자 「통일의 기회」였다. 당시 동유럽은 공산정권이 도미노처럼 붕괴되는 격동의 시기였다. 무슨 일이 어떻게 발전될지 세계가 조마조마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베를린장벽의 붕괴는 놀라움을 던져 주었다. 유럽의 대통합을 보기에는 일렀지만 통일을 추진하는데는 호기였다. 당사국인 서독은 당황했다. 통일로 연결시키기 위한 시나리오도 없었다. 베를린은 전승 4개국의 통제하에 있었고 동베를린 교외에는 소련군 3만5천명과 동독지역에 35만명이라는 바르샤바조약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콜은 독일의 재통일로 마음을 다잡았다. 바르샤바를 떠나면서 『독일인의 생존에 대한 전승국의 어떠한 형태의 간섭도 거부한다』는 불간섭원칙을 천명했다. 이튿날 열린 비상각의는 격론을 거듭했다. 콜은『통일이란 열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참모들이 검토한 통일의 절차는 대(對)동독긴급조치→조약공동체→국가연합→연방의 순이었다. 소요기간도 5∼10년이었다. 콜은 검토안을 버렸다. 『행동을 먼저 하고 생각은 나중에 하자』며 지리적 통일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리곤 베를린으로 날아가 「Wir sind ein Volk」(우리는 한민족)라고 선언했다. 통일의 열차가 출발한 것이다. 국내외 환경은 좋지 않았다. 에곤 크렌츠 동독서기장은 『국경은 없으나 통일은 협의의 대상이 아니다』라며 제동을 걸었다. 주변국은 독일의 재부상을 우려했다.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대통령은 『두개의 독일은 현실이며 역사의 결정』이라고 콜에 찬물을 덮어 씌웠다. 초강대국인 미국은 통일에 긍정적이었다. 당시 조지 부시대통령의 긍정적 확약을 받은 콜은 장벽붕괴 20일만에 통일조약 10개항의 발표를 강행했다. 역시 소련이 문제였다. 바르샤바조약국 일부에서는 조약군의 동독개입문제가 거론되고 있었다. 콜은 통일정책을 과감히 추진했다. 측근들에겐 동독과의 정치협상을 추진시켰고 디트리히 겐셔외무장관은 주변국을 맡아 설득에 나섰다. 『독일은 통일돼도 유럽공동체와 나토 안에 존재할 것이다』며 영국과 프랑스의 민족주의적 독주에 대한 우려를 설득했다. 폴란드에 대해서도 오데르―나이세 국경선과 통일후에도 지켜질 것이라고 약속했다. 소련은 콜총리가 직접 맡았다. 콜총리는 3차례나 모스크바를 방문, 고르바초프와 담판을 벌여 고르바초프로부터 『독일통일은 스스로 결정할 문제』라는 답변을 얻어냈다. 그 대가로 독일은 경제지원 소련군의 철군 및 철군병력의 숙소문제해결 등 각종 명목으로 무려 1백50억마르크를 지불해야 했다. 돈으로 통일을 산 셈이었다. 이듬해 3월 동서독 통합총선이 실시돼 콜총리의 기민당이 승리했다. 통일은 절반쯤 달성됐다. 내적 통일이 남았다. 가장 큰 걸림돌은 경제통합. 부작용을 우려한 반대의 소리가 높았다. 서독은 정치 사회적으로 위기상황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매일 2천여명의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DM(독일마르크)이 안오면 우리가 간다」며. 콜총리는 정치적 스승인 에르하르트총리의 말을 되새겼다. 『통일의 첫 단계는 마르크의 동독 유입』이라고. 의회에서 『재정적인 문제로 통일을 피하는 것은 독일이 역사에서 뒷걸음질 치는 것』이라며 통일비용을 걱정하는 의원들을 몰아붙였다. 콜은 화폐통합의 작전을 지시했다. 통화권을 쥔 연방은행총재도 따돌렸다. 4백50억마르크가 동독인민군의 호송하에 엘베강을 건너 동독지역 35개소에 보관됐고 7월1일을 기해 일제히 1대1로 교환됐다. 동독은 서독에 흡수됐고 대신 동독의 경제기반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해 11월3일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문에서 역사적인 통일의 행사가 이루어졌다. 독일인들은 「Wir sind ein Volk」를 다시 외쳤다. 「통일총리」가 된 콜은 내적통합을 위해 동독의 재건을 외치며 7년간 무려 1조마르크를 퍼부었다. 〈본〓김상철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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