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남 신부와 그가 과거 쓰던 샌드백. 홍 신부는 “젊었을 때 한창 힘들었을 때는 이놈으로 화를 풀곤 했는데 지금은 그럴 일이 별로 없어 보관만 하고 있다”라며 “지나치게 윤리성과 절제된 삶을 강조하면 자칫 자기 강박에 빠져 건강한 삶을 살기 어려울 수 있다”라고 말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원수는 사랑하지 마세요.”
신부가 어떻게 이런 말을? 최근 치유 에세이 ‘끝까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출간한 홍성남 마태오 신부(가톨릭영성심리상담소장)는 지난달 28일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동아일보와 만나 “마음이 감당할 수 없는 걸 하면 병이 난다”고 했다. 이 책은 아름다운 말로 마음을 어루만지는 힐링 에세이가 아니다. 알코올 의존증에 자살 충동에까지 이르렀던 자신과의 맹렬한 투쟁을 담은 자전적 이야기. 때문에 ‘전투적 치유 에세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사제가 ‘원수도 사랑하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종교가 늘 ‘용서하라’ ‘사랑하라’라고 가르치는데, 사람 마음은 그렇게 넓지 않아요. 내 마음에 응어리가 있는데 억지로 용서하면 화병납니다. 그래서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용서하고, 그 이상은 무리하지 말라고 하지요. 저도 전에는 기도나 명상을 하면 속이 넓어지고, 큰 사람이 될 줄 알았어요. 아니더라고요.”
―기도, 명상은 자아를 승화시키는 과정으로 압니다만….
“남을 포용한다는 건 내 자아가 굉장히 건강할 때만 가능한 일이에요. 그런데 대부분은 (병원 갈 정도는 아니어도) 늘 불안, 우울, 분노에 시달리며 살고 있거든요. 내 배가 풍랑 속 쪽배처럼 뒤집힐 것 같은데, 남을 태울 수 있겠습니까? 종교도 그걸 강요하면 안 돼요.”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종교가 강요한다고요.
“의외로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 빠진 사람이 많아요. 예를 들면 빚을 내서 남을 돕는데, 그렇게 못하면 자기가 믿음이 약해서 희생, 헌신하지 못하는 거라고 괴로워해요. 그러다가 신경질적인 병이 생기지요. 저는 종교가 모든 이에게 무조건 착하게 살라고 얘기하는 건 좀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의 상황을 봐야지요. 정신적, 물질적으로 굉장히 궁핍한 사람은 먼저 자기부터 채워야 해요.”
―그래도 신부인데 알코올 의존증과 자살 충동을 고백하는 건 좀….
“신부라고 좋은 말만 듣는 게 아니에요. 신자들로부터 비난도, 욕도 많이 먹지요. 그걸 술로 풀다 보니, 어느 날 미사 중에 손이 떨리더군요. 알코올 의존증 초기라는데 무기력증도 왔고요. 게다가 제가 신앙적으로 저 자신을 많이 학대했어요. ‘왜 기도할 때 집중을 못해’ ‘왜 그것밖에 안 돼’ 계속 야단친 거죠. 이게 심해지면 ‘독성 수치심’이 생겨요.”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독성 수치심이 뭡니까.
“자기 학대는 수치심을 낳는데, 이게 정도를 넘으면 독성으로 확대돼서 ‘나 같은 놈은 죽어버리는 게 나아’ 같은 생각을 들게 해요. 그게 극단적 선택을 유도합니다.”
―신부님은 이겨내신 것 같습니다만….
“우연한 기회에 한 신부님을 만났는데…고민에 답을 해주는 게 아니라 저보고 ‘할 말 있으면 해 보라’고 하시더군요. 물론 한 번에 그렇게 된 건 아니지만, 정말 설사가 터지듯 속마음이 가장 밑바닥에 이를 때까지 다 나왔어요. 신부가 남의 상담, 고해성사는 받았어도 자기 얘기를 누구에게 털어놔 봤겠습니까. 그게 전환점이 된 거죠. 샌드백도 치고….”
―샌드백이요?
“억지로 용서하면 내가 병들어요. 내 안의 분노와 화부터 풀어야지요. 저는 샌드백에 미운 사람 이름을 써놓고 마구 쳤습니다. 사람 때문에 누군가 화를 내면 옆에서 ‘내가 대신 때려줄게’라며 맞장구를 쳐주세요. 그것만으로도 많이 풀립니다. 보통 사람이 기도, 명상으로 마음을 비워 화를 푸는 건 정말 어려워요. 종교가 너무 어렵게 가르치는데, 가끔은 망가지고 이기적으로 살아도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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