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에게 ‘대만 문제로 중국을 자극하지 말라’는 입장을 전달했다고 26일(현지 시간) 미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보도했다. 다카이치 총리의 ‘대만 유사시 개입’ 발언 이후 중-일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양국 정상과 연이어 통화한 트럼프 대통령이 사실상 중국의 손을 들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미-일 관세 협상으로 5500억 달러(약 806조7400억 원) 투자를 약속한 일본의 입장에서는 미국에게 뒤통수를 맞은 상황인 셈이다.
WSJ는 이날 미국과 일본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트럼프 대통령이 전날 다카이치 총리와의 전화 통화에서 대만 문제와 관련해 “베이징을 자극하지 말라”고 조언했다고 보도했다. 관계자는 “트럼프 대통령의 어조가 미묘(subtle)했고, 다카이치 총리에게 발언을 철회(walk back)하라고 압박하지는 않았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일본 정부 관계자들은 이 같은 메시지를 우려스럽게 받아들였다고 WSJ는 전했다.
전문가들은 중국에 먼저, 일본에 그 다음으로 연락한 순서를 두고 트럼프 대통령이 미-중 무역관계를 위해 핵심적인 지정학적 문제에 대한 동맹의 입장을 억제할 의지가 있음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매튜 굿맨 전 백악관 아시아 담당 보좌관은 WSJ에 “미국 대통령이 중국과 일본 정상 모두와 대화하는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면서도 “하지만 그 순서는 일본 입장에서 놀랄 만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시진핑(오른쪽) 중국 국가주석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31일 경주에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열린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2025.10.31. 경주=AP/뉴시스앞서 다카이치 총리는 7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대만 유사시 집단자위권을 발동해 개입하겠다”고 발언하면서 중-일 갈등의 불씨를 지폈다. 이후 중국은 일본 여행 및 유학 자제령, 일본 영화 상영 중단, 일본산 수산물 수입 금지 등 전방위 보복 조치를 취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이에 굴하지 않고 “정부 입장은 한결같다”며 발언 철회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양국 갈등이 장기화될 조짐이 보이자 트럼프 대통령은 중재에 나섰다. 트럼프 대통령이 먼저 통화한 것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었다. 시 주석은 약 1시간의 통화에서 “대만의 중국 복귀는 전후 국제질서의 중요한 구성 부분”이며 “중국과 미국은 과거에 파시즘과 군국주의에 함께 맞섰고, 현재는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 성과를 공동으로 지켜야 한다”고 밝혔다.
이후 트럼프 대통령은 다카이치 총리와도 약 25분간 통화했다. 미국 측 관계자는 WSJ에 “트럼프 대통령이 다카이치 총리에게 대만 관련 발언 수위를 낮추는 방안을 시사했다”고 전했다. 또 다카이치 총리가 높은 지지율 속에서 발언을 철회하기 어렵다는 정치적 상황을 트럼프 대통령이 이해하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8일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에 있는 미 해군 기지에 정박 중인 미 항공모함 USS 조지 워싱턴호에서 미군 장병들을 대상으로 연설하고 있다. 옆에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서 있다. 도쿄=AP/뉴시스트럼프 대통령과의 통화 이후 다카이치 총리는 다소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그는 26일 토론회에서 대만 관련 발언 이후 중국과의 갈등에 대한 질문을 받자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하고 싶지 않다”고 답했다. 이를 두고 미국의 압박에 굴복해 발언 수위를 조절한 것이란 해석이 나왔다.
트럼프 대통령이 사실상 중국을 두둔한 배경으로는 ‘미국산 대두(大豆)의 중국 수출’ 문제가 꼽힌다. 대두는 트럼프 대통령의 주요 정치적 지지기반인 농가의 주요 수출 품목으로, 중국의 수입 거부로 큰 타격을 입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시 주석과의 관계 회복을 도모하는 상황에서 대만을 둘러싼 갈등으로 미-중 무역 합의가 위태로워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백악관 관계자는 WSJ에 “트럼프 대통령과 시 주석의 통화는 무역에 관한 것이었다”며 “미국은 중국이 약속한 대두 구매를 미루는 상황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시 주석과의 통화에서 “좀 더 빨리 대두를 구입해달라”고 요청했다고 밝혔다. 실제 중국은 통화 이후 3억 달러(약 4397억 원) 규모의 미국산 대두 구매 계약을 체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성명을 통해 “미국과 중국의 관계는 매우 좋으며, 이는 우리의 동맹국인 일본에게도 매우 좋은 일”이라며 “중국과 잘 지내는 것은 중국과 미국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일본, 중국,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와 훌륭한 무역 협정을 체결했고, 세계는 평화롭다”며 “그 상태를 유지하자”고 했다.
일본 정부는 WSJ 보도에 대해 외교상 대화라 언급하기 어렵다며 논평을 자제했다. 기하라 미노루 관방장관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관련 보도가 사실인지 묻는 질문에 “회담(통화)의 상세한 내용은 외교상 대화이므로 답변을 자제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일 정상이 동맹 강화, 인도·태평양 정세와 과제 등에 대해 폭넓게 의견을 교환했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의 미중 관계에 관해 설명했다. 양 정상은 현재의 국제 정세에서 미일 간 긴밀한 연계를 확인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일본 정부 관계자는 NHK에 “트럼프 대통령과 다카이치 총리 사이에 사태 진정화를 위해 협력해 가자는 뉘앙스의 이야기는 있었다”며 “(미국이) 자제를 요구한 것은 아니다”라고 전했다.
일본 내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분명한 지지를 나타내지 않은 것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아사히신문은 “정부 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총리의 ‘대만 유사시’ 발언에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한 불안감이 여전히 크다”며 “트럼프 대통령의 대만 문제에 대한 정확한 입장이 여전히 불투명하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다카이치 총리의 발언이 부적절했다는 불만도 나오고 있다. 일본 누리꾼들은 “국회의원 시절 발언과 총리로서 말하는 것은 다르다” “다카이치 총리의 발언이 여러 산업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등의 반응을 보였다. 반면 다카이치 총리가 끝까지 발언을 철회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있었다. 일부 누리꾼은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여야 한다” “지지율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지지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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