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수의 라스트 씬] 잘 있기 힘든 세상…그들이 아닌 우리의 이야기 ‘카트’

  • 스포츠동아
  • 입력 2018년 7월 30일 06시 57분


부당한 해고의 위험 앞에서 불편부당하지 않은 공권력의 물세례를 맞으며 비정규직들은 카트를 밀고 나아간다. 카트는 물세례에 비할 바조차 되지 못하지만 기어이 바위를 뚫고야 마는 낙숫물이 되었다. 사진은 영화 ‘카트’의 마지막 장면이다. 사진출처|영화 ‘카트’ 캡처
부당한 해고의 위험 앞에서 불편부당하지 않은 공권력의 물세례를 맞으며 비정규직들은 카트를 밀고 나아간다. 카트는 물세례에 비할 바조차 되지 못하지만 기어이 바위를 뚫고야 마는 낙숫물이 되었다. 사진은 영화 ‘카트’의 마지막 장면이다. 사진출처|영화 ‘카트’ 캡처
■ 영화 ‘카트’

싱글맘·알바생 등 비정규직의 눈물
사람대접 해달라는 세상 향한 절규
마침내 정규직 전환 반가운 소식도


“Si vales bene est, ego valeo!”(시 발레스 베네 에스토, 에고 발레오)

냉면은 차가운 스테인리스 그릇에 담겨 내어져 왔다. 살얼음으로 살짝 얼린 맛깔스럽게 보이는 빨간 국물 속에서 면발이 오이채 아래 둥그런 모양으로 말려 자리를 잡고 있었다. 3500원짜리 ‘원조냉면’은 ‘매운’ 맛과 ‘중간’ 맛, ‘하얀’ 맛 등 세 종류였다. 중간 맛을 선택해 주문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냉면이 탁자에 올려졌다.

면발을 풀어 헤치며 식당 안을 둘러보았다. 영업 마감 시간을 30여분 앞두고도 비좁은 식당 안엔 빈 자리가 없었다. 평소 붐빌 때에는 긴 대기 줄이 선다고 했다. 식당에서 가장 비싼 음식은 ‘원조 비빔냉면’으로 5000원이다. 많은 사람들의 탁자 위에는 매콤하고 달콤하며 쫄깃한 냉면과 김밥이 함께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은 그리 엇비슷하게 차가운 음식을 먹으며 폭염이 여전히 잦아들지 않은 뜨거운 여름날의 한 저녁을 보내고 있었다. 식당 안 사람들의 일상은 모두들 안녕한 듯 보였다. 냉면은 서로가 서로의 안부를 묻는 매개체처럼 보였다.

영화 ‘카트’의 한 장면. 사진제공|리틀빅픽처스
영화 ‘카트’의 한 장면. 사진제공|리틀빅픽처스

● 나, 타인 그리고 우리

“Si vales bene est, ego valeo!”(당신이 잘 계신다면 잘되었네요. 저는 잘 있습니다!)

옛 로마인들은 상대의 안부를 이렇게 물었다. ‘라틴어 수업’의 저자 한동일 바티칸 대법원 변호사에 따르면 로마인들은 편지를 쓸 때 이런 인사말을 적었다. 그들은 또 “수신인이 편지를 받아 읽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생각이 전해진다고 생각해서 그 때를 맞춰 시제를 작성했다”는데, “현재는 과거로, 과거는 과거완료로, 미래는 능동 미래분사로 표현”했다. 타인과 상대방에 대한 배려의 마음인 셈이다.

로마인들은 때로 이 문장을 줄여 “Si vales bene, valeo”로도 썼다.

“당신이 잘 있으면, 나도 잘 있습니다.”

안부의 인사는 그렇게 나보다는 타인을, 나보다는 상대방을, 나보다는 우리를 향한 것이어야 한다. 한동일 변호사는 “오랜 경기침체와 출구가 보이지 않는 실업률, 각박해지는 근로환경에 젊은이들은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하고 불안한 미래 속에서 점점 여유를 잃어”가고, “중장년층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아서 “이 불의한 시대를 살아가는 최고의 방법처럼 회자되는 것”은 “각자도생”이라며 안타까움을 드러내고, “함께(cum)와 더불어(cum)의 가치”를 강조했다.

하지만 그 가치를 잊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세상은 이미 그 가치를 저버린 작태로서 또 얼마나 위태로운가.

대형마트의 대리이자 정규직 사원인 동준(김강우)은 이제야 비로소 확연히 보이는 그 위태로운 세상 앞에서야 비로소 “내 문제”가 타인과 상대방과 우리의 것이기도 함을 깨달았다. 아니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자기들 문제로 닥치기 전까지는 나서지 못했”던 터였다. 이미 비정규직들은 하루아침에 달랑 전화 문자메시지 한 통으로 해고를 통보 받았다.

이들이 무언가를 잘못해 회사에 해를 끼친 것도 아니다. 그저 임신했다는 이유만으로 잘린 경험을 지닌 채 온전한 육아 지원조차 제대로 받을 수 없는 싱글맘이거나, 대학을 졸업하고 면접만 50번 넘게 봤지만 취업에 실패하고 별의별 아르바이트를 다 한 청춘이거나, 20년 넘도록 ‘청소밥’으로 생계를 이어왔거나, 아이의 스쿨뱅킹 계좌에 아이 급식비를 제때 입금하는 것을 잊을 만큼 먹고 살기 바쁜 두 아이의 엄마일 뿐이다. 이들은 회사와 그 경영자들의 눈에는 고작 “반찬값” 정도로만 보일 “생활비”의 절박함을 위해 일한 죄밖에 없었다.

영화 ‘카트’의 한 장면. 사진제공|리틀빅픽처스
영화 ‘카트’의 한 장면. 사진제공|리틀빅픽처스

● “당신이 잘 있으면, 나도 잘 있습니다”

회사는 비정규직을 용역으로, 정규직을 연봉계약직으로 각각 전환해 마트를 매각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해고는 기업 매각을 위한 ‘코스’처럼 여겨지는 현실. 근로계약 기간을 명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계약을 해지해 사실상 해고할 수 있고, 그 억울함을 호소하며 요구하는 대화는 또 얼마든지 묵살당할 수 있는 구조.

그런 부당한 현실과 구조의 벽을 깨뜨리기란 정말 불가능한 것인가. 그 높디높아 보이는 장벽 앞에서 무언가 거창한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단결력을 다짐하며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는 문구가 새겨진 조끼를 입고 “우리가 바라는 건! 우리가 바라는 건! 우리가 바라는 건! 이렇게 외치는 우리를 봐 달라는, 우리의 얘기를 들어달라는 것!”이라고 소리쳤다.

몇 푼 되지도 않는 아르바이트의 대가마저 떼어 먹으려는 편의점 사장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아들이 억울해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상이 되어 달라는 외침이다. 폭력적인 용역깡패와 부정한 경영자들과 불공정한 공권력을 향해서가 아닌, 그저 “사람대접”을 해달라고 세상을 향해 외치는 절규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온전한 대접을 해주는 세상. 사람이 사람으로부터 온전한 대접을 받는 세상. 사람 사이에 오가는 안부는 그제야 제대로 된 인사가 된다. “Si vales bene, valeo”라는 옛 로마인들의 안부 인사가 의미하는 바, 그리 가볍지 않은 이유일 테다.

“그대가 평안해야 나도 안녕하다”는 그 의미처럼, 한 방울의 “낙숫물”이 되어 살고자 했던 한 정치인이 세상을 떠났다. 가난해서 갖지 못한 자, 힘이 없어서 쥐지 못한 자, 세상이 외면해서 밀려나고 소외된 자들의 외침을 들으며 부당한 현실과 구조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싶었던 그는 7년 동안 국회에서 대표 발의한 119건을 포함해 모두 945건의 법률안을 냈다. 그 가운데 호주제 폐지를 핵심으로 한 민법 개정안, 장애인 차별 금지법 등이 시행 중이고, 정리해고 제한법 등은 국회에 계류 중이다.

그는 한때 자신의 지역구였던 서울 노원구 상계동에서 오랜 세월 자리잡아온 한 식당의 3500원짜리 냉면을 즐겨 먹었다. 그 입맛을 따라가 본 것은 그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지 닷새 만에 경기도의 한 공원묘원에서 영면에 들어간 날이었다. 대형마트 홈플러스 스토어즈의 무기계약직 사원들이 정규직으로 전환된다는 소식이 전해진 다음 날이었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이를 시리게 하는, 채 녹지 않은 냉면의 살얼음이 더운 기운을 조금씩 식혀주었다. 냉면이 남긴 매콤달콤한 뒷맛이 오래도록 입안을 맴돌았다.

“Si vales bene, valeo!”

영화 ‘카트’의 한 장면. 사진제공|리틀빅픽처스
영화 ‘카트’의 한 장면. 사진제공|리틀빅픽처스

■ 영화 ‘카트’는?

한 대형마트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사원들이 사측의 일방적인 계약 해지에 따라 대량 해고의 위기에 처해 그 부당함에 맞서는 이야기. 거의 모두가 생계를 책임진 여성인 이들의 투쟁기가 상업영화의 틀 안에서 짙은 공감을 자아낸다. 최근 그 실제 모델이 된 홈플러스 무기계약직 직원들이 정규직으로 전환되면서 영화는 또 한 번 회자됐다. 부지영 감독의 2014년 개봉작으로, 염정아를 비롯해 문정희, 김영애, 천우희 등이 출연했다.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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