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구가인] 루저스피릿④ 영화제작집단 ‘키노망고스틴’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2월 18일 15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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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탑방에 사는 이웃집 좀비"

10 평 남짓한 옥탑방을 주 배경으로 촬영한 영화 ‘이웃집 좀비’. 순 제작비 2천 만 원이 든 초저예산 인디영화다.
10 평 남짓한 옥탑방을 주 배경으로 촬영한 영화 ‘이웃집 좀비’. 순 제작비 2천 만 원이 든 초저예산 인디영화다.

영화 '이웃집 좀비'(2월18일 개봉)는 한국에서 흔치 않은 좀비영화다. 순수 제작비 2000만 원의 초저예산 영화임에도 지난해 부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관객상과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고 일찍이 영화전문지들의 관심을 받았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영화제작집단 키노망고스틴의 오영두, 류훈, 장윤정, 홍영근 씨 네 명이다. 이들을 만나기 위해 서울 옥수동 옥탑방으로 향했다.

동네사람들에게 '영화 하는 집'으로 불리는 이들의 옥탑방은 동종업계 동료이자 부부이기도 한 오영두, 장윤정 씨의 살림집이자 키노망고스틴의 사무실 겸 영화 제작공간이기도 하다. 10여 평 남짓한 그 공간에서 영화 '이웃집 좀비'의 8할이 촬영됐다.

"금호역 ○번 출구에서 나오면 왼쪽에 카센터가 보이는데요, 그 카센터 뒤로 난 길로 20m 더 가면 Y자 길이 나오고, 또 거기서… (중략) 그러면 계단이 보이는데, 그 길을 올라오시면 됩니다."

"계단 끝까지 올라가면 될까요?"(기자)

"네, 계단 오르시다가 '좀 힘들다' 느끼는 지점에서, 조금만 더 오르면 저희 작업실이 나옵니다."

설명대로 몇 개 갈림길을 통과한 후 돌계단에 다다랐다. 다소 가파른 계단을 오르다가 '좀 힘들다' 싶어 고개를 들었더니, 진짜로 누군가 옥상에서 "여기요!" 외친다.

영화제작집단 키노망고스톤. 오른쪽부터 류훈, 오영두, 장윤정, 홍영근.
영화제작집단 키노망고스톤. 오른쪽부터 류훈, 오영두, 장윤정, 홍영근.
▶ 등장인물 소개

오영두 : 35세, 남. 대학 재수 준비 학원을 다니던 어느 날 갑자기 영화를 하기로 마음먹고, 1995년 영화 '꼬리치는 남자' 연출부로 영화판에 입문했다. 이후 10여 편의 상업영화에 미술팀과 연출팀으로 참여하고 4편의 단편 연출했다. 한 때 잠깐 영화일에 회의를 느끼고 호주 이민을 계획했으나 영화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다시 돌아왔다. 아내 장윤정, 영화판에서 알게 된 류훈, 군대 후배 홍영근 등과 키노망고스틴을 만들었다. 첫 장편옴니버스영화 '이웃집 좀비'에서는 '틈사이'와 '도망가자'의 각본과 연출을 맡고, 전체 영화의 촬영과 미술, 편집을 담당했다.

류훈 : 37세, 남. 키노망고스틴의 최고령자이자 아이디어뱅크. 국내 유명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했지만, 영화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서울예대 재입학 해 영화 '텔미썸딩'의 제작부로 첫 현장경험을 쌓았다. 이후 시나리오 각색 작업 등에 참여하다 '작품이 엎어지는' 불운을 몇 차례 경험한다. 4년간 훌쩍 해외 선교봉사를 떠나 다큐멘터리 촬영을 했고, 만화스토리작가 등을 겸업했다. '이웃집 좀비' 에서는 '백신의 시대'의 각본과 연출을 맡았으며, 자신의 전 재산인 카메라와 편집장비를 동료 영화인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하고 있다.

장윤정 : 36세, 여. 영화 전문 메이크업아티스트. 1993년 처음 영화 분장일을 시작해, '정사' '번지점프를 하다' '가을로' '집행자' 등 20여 편이 넘는 장편영화의 분장을 맡았다. 남편 오영두 등과 키노망고스틴을 만들고 이사자금으로 쓰려던 곗돈을 깨 '이웃집 좀비'의 제작비를 지원하던 차, 감독으로도 참여하게 됐다. '이웃집 좀비'의 에피소드 '그 이후… 미안해요'는 그의 첫 연출 작품.

홍영근 : 33세, 남. 키노망고스틴의 막내이자 오영두의 군대 1년 차 후임. 청소년기 동네 비디오가게 비디오를 모두 섭렵하면서 영화인을 동경하게 됐다. 꿈을 잊고 생활인으로 살던 20대 후반의 어느 날 갑자기 솟아난 열정으로 뒤늦게 동아방송대에 입학했다. 연기를 전공했지만 그 못지않게 연출에 대한 욕심도 크다. '이웃집 좀비'에서는 '뼈를 깎는 사랑' '페인킬러'의 감독을 맡고, 무술감독을 겸했다.

자신의 작품을 연출하지 않을 땐 배우와 촬영스태프 역을 맡는다. 첫 번째 에피소드 ‘틈사이’의 주연을 맡은 홍영근.
자신의 작품을 연출하지 않을 땐 배우와 촬영스태프 역을 맡는다. 첫 번째 에피소드 ‘틈사이’의 주연을 맡은 홍영근.
▶ 발단: "무엇이든 찍어야 한다"

네 사람은 영화일을 하게 된 계기가 각기 다다르다. 예컨대 장윤정씨가 스무 살 무렵 메이크업아티스트 일을 시작해 우연하고도 자연스럽게 영화 분장을 하게 됐다면, 오영두씨는- 마치 야구장 외야에서 하늘을 가로지르며 날아가는 공을 보고 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하루키처럼-재수학원에서 강의를 듣다 "어느날 갑자기 영화를 하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스물한 살부터 영화 일을 하게 됐다.

그런가 하면 스스로를 "오타쿠 기질이 다분하다"고 표현하는 류훈씨는 애니메이션과 영화 마니아로 지내던 중 "대학 졸업 무렵 진짜 좋아하는 일을 고민하다" 영화판에 입문했고, 홍영근씨는 막연하게 영화 일을 동경하던 중 군대에서 오영두씨를 만나면서 실체적인 꿈을 꾸게 됐다.

각기 다른 계기로 영화에 입문했지만 어쨌건 자신의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점에서 비슷한 꿈을 꿨던 네 사람은 한 때 영화판에 회의를 느끼고 해외에 나가거나 꿈을 포기하고 생활인으로 지내는 등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기도 하지만 "가족 혹은 종교와 같은" 영화를 포기하지 못하고 다시 영화판으로 돌아왔다.

같은 꿈을 품었기에 죽이 잘 맞은 이들은 자주 옥탑방에 모여 꿍꿍이를 나누고 꿍짝을 맞추곤 했다. 그리고 마침내, 2008년 어느 여름날 "(좋은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고민하기 보단) 현장감을 잃지 않기 위해서 무엇이든 찍는 게 낫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영화 제작을 위해 키노망고스틴이라는 영화제작집단을 만든다. 당시 류훈씨가 전 재산을 털어 HD 카메라를 비롯해 편집기기를 구입한 덕에 장비 걱정은 덜한 상황. 여기에 장윤정씨는 이사비용으로 마련했던 곗돈을 제작비로 내놓았다.

"곗돈을 1700만원 받았는데 사실 처음에 그 돈을 다 쓸 생각은 없었어요. 그런데 조금씩 쓰다 보니, 결국엔 그 돈도 모자라서 다시 일을 할 정도가 됐죠. 하지만 후회는 안 해요. 어떻게든 들인 비용만큼 남길 거라고 믿었으니까(웃음)." (장윤정)

적은 제작비에 되도록 외부촬영을 줄이고자 좀비 바이러스 설정을 넣었다.
적은 제작비에 되도록 외부촬영을 줄이고자 좀비 바이러스 설정을 넣었다.
▶ 전개: 바이러스 걸린 좀비여야만 했던 이유

'이웃집 좀비'는 키노망고스틴의 첫 번째 장편 옴니버스 영화다.

2010년 좀비 바이러스로 인해 초토화된 서울에서 숨어살고 있는 좀비들의 무척 인간적인 이야기를 6개의 에피소드로 나눠 담았다. 좀비인 남자와 숨어사는 여자의 러브스토리('도망가자')나 백신이 필요한 좀비와 거대제약회사 싸움('백신의 시대'), 과거 좀비였던 남자와 좀비에게 부모를 잃은 여자의 이야기('그 이후…미안해요'), 본인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모른 채 마감시간과 싸우는 한 작가 이야기('페인킬러') 등… 이들의 영화 속 좀비는 공포의 대상이라기보다, 우리와 같은 감정을 가졌지만 늘 숨어 지내고 쫓기는 사회의 약자다. 혹자는 이들의 영화를 '한국형 좀비물'이라고 칭했다.

- 한국영화 중에 좀비영화로는 최초인가요?

"아니요. 80년대 '괴시'라는 영화가 있어요, 본 사람은 거의 없지만. 또 2006년 옴니버스 영화 '어느 날 갑자기'의 한 에피소드로 좀비 얘기고요. 다만 좀비를 전면에 내세워 알려진 영화는 우리가 처음인 것 같아요."(홍영근)

- 좀비영화를 원래 좋아했나요?

"사실, 영근이만 좋아해요. 단편 소재로만 생각했다가, 좀비와 관련해서 아이디어가 여러 개 나오다 보니 에피소드를 엮어 옴니버스 식으로 잇기로 한 거죠. 윤정이가 분장 전문가니까 특수 분장도 가능하고, 한국영화에서 잘 다루지 않은 소재니까 왠지 더 해보고 싶더라고요. 또, 가능한 한 외부촬영을 줄이려고 좀비 바이러스가 있다고 설정 했어요."(오영두)

- 영화 보면서 좀비 바이러스 얘기에서 신종플루 바이러스가 떠올랐어요. 영화 촬영 할 때는 아직 신종플루가 출현하기 전일텐데….

"신종플루가 유행할 때 저희도 엄청 놀랐어요. 훈이 오빠가 생물학과 출신이라 기본적으로 바이러스에 대해 많이 알긴 했어요."(장윤정)

‘이웃집 좀비’는 좀비를 영화 전면에 내세운 흔치 않은 한국형 좀비영화다.
‘이웃집 좀비’는 좀비를 영화 전면에 내세운 흔치 않은 한국형 좀비영화다.
▶ 위기: 모든 길은 DIY(Do It Yourself)로 통한다

이들은 2008년 9월 말 촬영을 시작해 2009년 1월1일 새벽 서울 명동거리를 찍는 것을 마지막으로 촬영을 마쳤다. 외부에서 촬영한 '백신의 시대'를 제외하고 각 에피소드들의 평균 촬영 기간은 이틀에서 사흘. 촬영 기간 동안에는 배우들과 함께 숙식을 했다.

"눈뜨면 하는 말이 '카메라 충전됐어?' 였어요. 잠옷 입은 상태에서 찍을 분량을 점검하고 식사를 준비하는 틈에도 촬영을 했죠."(류훈)

자신의 작품에 감독 뿐 아니라 서로의 작품의 배우이자, 스태프이기도 하다.

"한 사람이 카메라를 잡으면, 다른 사람이 옆에서 보조하고, 다른 사람은 붐 마이크를 들고… 심지어 배우도 그냥 놀 수 없어요. 손이 부족하니까."(홍영근)

- 카메라 말고 다른 장비들은 어떻게 조달했나요?

"많은 경우 DIY, 직접 만들어서 사용했어요. 예컨대 전문 조명 대신 형광등 몇 개 분리하거나 공사장 작업등을 이용했고, 마이크 붐대가 없어서 청소용 막대를 따로 떼서 만들기도 했어요. 심지어 와이어 같은 스턴트 장비가 없어서 카메라를 배우에게 묶고 뛰게 했는데 너무 위험한 짓이라 정말 조마조마했어요. 사고 안 나서 너무 다행이죠."(류훈)

- 제작비 중에 가장 많이 들어간 비용은?

"밥값하고, 배우 비용이요. 한번 모이면 70만원 정도 깨져요. 특히 외부 촬영이 많은 '백신의 시대' 때는 밖에서 2주간 먹고 자고 촬영까지 하느라 돈이 많이 깨졌죠."(장윤정)

- 조금 불안한 생활인데, 주변에서 걱정하진 않나요?

"걱정은 많이 하죠. 대신 저희는 재미있는 일을 하잖아요? 그리고 이렇게 시간이 흐르더라도 남들과 내가 서 있는 지점에서 그렇게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누군가가 벤츠를 몰고 가는 것과 내가 마티즈 몰고 가는 것의 차이가 크지 않다는 거죠. 명품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삶이 즐거워지는 건 아니니까."(오영두)

▶ 절정: 좀비, 일본까지 떴다

네 사람은 '이웃집 좀비'를 비롯해 자신들이 만드는 영화가 철저한 상업영화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웃집 좀비' 역시 대중에게 좀 더 어필하기 위해, 편집을 하는 데만 4개월 가까이 걸렸다. 당시 지인을 비롯해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영화를 보여주고 조언을 구했다. 여기에 10여 년 간 영화판서 쌓아온 인맥을 통해 디지털 후반작업과 영화음악, 사운드 문제 등을 해결했다.

최근 인디스토리와 배급계약을 맺기 전까지 이들은 '이웃집 좀비'의 홍보와 마케팅도 DIY 방식으로 했다.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들고, 예고편 영상을 만드는 것부터 전단지 디자인까지 모두 네 명의 감독과 주변 지인들의 힘을 빌려 해냈다(예컨대, 이웃집 좀비 1차 예고편에 등장했던 개그맨 김경진의 경우 홍영근씨가 개인적인 친분을 통해 섭외했다고).

영화 '이웃집 좀비'는 최근 경사가 겹치고 있다. 지난 12일 일본의 영화 배급사인 엑설런트 필름스(excellent films)에 선판매해 개봉 전 실제작비를 뛰어넘는 수익을 거둬들였고, 25일 개막하는 유바리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에도 초청된 만큼 북미시장 수출도 기대되고 있다.

"우리끼리 자주 하는 얘긴데, 마치 영화가 생명력이 있어서 스스로 알아서 자기가 갈 길을 가고 있는 거 같아요."(장윤정)

‘이웃집 좀비’는 키노망고스톤이 제작한 첫 번째 장편영화다.
‘이웃집 좀비’는 키노망고스톤이 제작한 첫 번째 장편영화다.
▶ 결말: 이웃집 좀비는 현재도 진화 중

영화가 좋아 20대와 30대를 고스란히 바쳤고 "매년 1년에 한번씩, 죽기 전까지 영화를 찍는 것이 꿈"이라고 말하는 키노망고스틴 네 사람은 요즘 그래서 살맛이 난다.

좀 더 일찍 기회가 오지 않은 것에 대해 아쉬운 점은 없냐는 물음에 주저 없이 "5년 늦게 하고 10년 더 할 수 있다면 그게 더 나을 거 같다"고 말한 이들의 뚝심이 제대로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 앞으로 어떤 영화를 찍고 싶나요?

"글쎄 잘 모르겠어요. 저희가 치밀하게 계획대로 움직이는 건 아니에요. 이웃집 좀비에 이어 이웃집 외계인이 될 수도 있고…(웃음). 확실한 건 저희는 영화를 찍는 그 순간순간 너무 행복했다는 거에요. 그 이유로 계속해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거죠."(오영두)
구가인 기자 comedy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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