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권재현]중세를 풍자했던 ‘돈키호테’가 근대 이성중심주의를 풍자한 ‘맨 오브 라만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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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월 28일 17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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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산초의 역할을 대신하는 인물이 여주인공 알돈자(이혜경)이다. 주막집 하녀이자 창녀인 알돈자를 돈키호테는 둘시네아 공주로 착각한다.
소설 속 산초의 역할을 대신하는 인물이 여주인공 알돈자(이혜경)이다. 주막집 하녀이자 창녀인 알돈자를 돈키호테는 둘시네아 공주로 착각한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팸플릿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이 작품의 원작인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전 세계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렸다"고. 후훗. 웃음이 절로 나옵니다. 도대체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은 왜 이렇게 많은 걸까요? 이 표현이야말로 해당 책을 홍보하는 게 아니라 결국 성경이 제일 많이 팔린 책임을 홍보하고 있음을 사람들은 왜 눈치 채지 못할까요? 생각은 그 다음으로 달려갑니다. '돈키호테'를 완독한 사람이 정말 그렇게 많을까요?

뮤지컬은 확실히 많은 사람이 본 것 같습니다. 1965년 초연된 뒤 브로드웨이에서 네 차례나 리메이크가 됐고 할리우드 영화로도 제작됐으니까요. 서울 강남구 삼성동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되고 있는 한국어 공연도 2005년 정식 라이선스 공연 이후 벌써 네 번째 무대입니다. 작품을 못 본 분이더라도 주제곡인 '이룰 수 없는 꿈'(Impossible Dream)은 들어보면 "아, 이 노래"라고 할 만큼 귀에 익은 노래입니다. 작곡가 미치 리는 이 노래로 1973년 미국 작곡가 명예의 전당 현대 클래식 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수상이 이례적인 이유는 미치 리가 작곡한 뮤지컬 중 성공작은 처녀작인 '맨 오브 라만차'가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 '돈키호테'와 '맨 오브 라만차'의 차이


무대는 스페인 세비야의 거대한 지하 동굴감옥. 깊은 어둠 속에서 기타 반주에 맞춰 한 죄수가 노래를 부르고 다른 죄수는 플라멩코 춤을 춥니다. 다음 순간 왼쪽 천정부근의 벽이 갈라지면서 철제 계단이 서서히 내려옵니다. 포승줄에 묶여 걸어 내려오는 두 사내. '돈키호테'의 저자인 미겔 데 세르반테스(정성화)와 그의 시종 산초(이훈진)입니다. 세르반테스는 직업군인으로 전투 중 부상으로 왼팔을 못 쓰게 됐고 알제리 해적에게 잡혀 5년간 포로생활을 한 뒤 시인, 극작가, 세리(稅吏)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데일 와서맨이 대본을 쓴 뮤지컬은 세르반테스가 세리시절 비리혐의로 3개월간 옥살이를 했던 1597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1605년 '돈키호테'를 출간하기 7년 전입니다.

다시 공연으로 돌아가 종교재판에 회부된 세르반테스는 그에 앞서 지하감옥 죄수들에게 재판을 받습니다. 그는 거기서 "미겔 드 세르반테스. 너를 이상주의자, 엉터리 글쟁이, 그리고 고지식한 인간으로 기소한다. 무죄인가?"란 질문을 받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변론을 연극형식으로 펼칩니다. 그 내용이 바로 그가 쓰고 있던 '돈키호테'입니다.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 역을, 시종 산초가 산초 판자 역을 맡고 다른 죄수들이 다른 배역을 맡아 돈키호테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소설 '돈키호테'를 닮은 듯 하면서 어긋나있습니다. 물론 극중 돈키호테는 여전히 시대착오적 존재로 그려집니다. 허름한 주막집을 거대한 성채로 착각하고, 주막집 주인을 성주로 착각해 기사작위를 내려달라고 청합니다. 이발사의 대야를 황금투구로 착각하고 그걸 좋다고 뒤집어쓰거나 풍차를 거인으로 착각하고 무모하게 돌진했다가 풍비박산 나는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도 이 남자 "나는 나, 돈~키호테/ 라 만차의 기사/ 운명이여 내가 간다/ 거친 바람이 불어와 나를 깨운다/ 날 휘몰아 가는구나/ 그 어느 곳이라도/ 영광을 향해 가자"를 힘차게 부릅니다.

음, 그 모습이 왠지 익숙합니다. 노래방에서 술에 취한 어른들이 "기운 센 천하장사/ 무쇠로 만든 사람/ 우리들을 위해서만 힘을 쓰는 착한 이"라는 만화영화 마징가Z 주제곡을 열심히 부르는 모습을 닮았다고 할까요. 그런데도 이 허무맹랑한 남자가 왠지 믿음직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요? 그 지점에 원작소설과 뮤지컬의 차이가 놓여있습니다. 소설에서 돈키호테의 이상주의를 은근히 조롱하고 야유하는 지극히 현실적 짝패가 존재합니다. 그의 시종 산초 판자입니다. 그런데 뮤지컬 속 산초는 처음부터 "좋으니까/ 그냥 좋으니까/ 내 손톱 하나씩 뽑혀도 난 좋아"라며 돈키호테의 편에 섭니다.

뮤지컬은 소설 속 산초의 역할을 대신하는 특별한 인물을 창조해냈습니다. 바로 여주인공 알돈자(이혜경)입니다. 알돈자는 주막집 하녀이자 창녀입니다. 돈키호테는 그런 알돈자를 기사로서 기꺼이 생명를 받치기로 맹세한 둘시네아 공주로 착각합니다. 소설에서도 둘시네아란 이름은 등장하지만 어디까지나 돈키호테의 '환상 속 그대'에 불과할 뿐 실제 모습을 드러내진 않습니다. 뮤지컬에선 그 둘시네아를 알돈자라는 인물로 육화시킨 뒤 냉혹한 현실을 투영시킴으로써 산초를 대신해 돈키호테 식 이상주의의 허구성과 뚜렷한 대조를 끌어냅니다.
환상의 여인 둘시네아에게 버림을 받은 돈키호테는 현실을 상징하는 '거울의 기사'에 비친 자신의 초라한 모습에 충격을 받고 쓰러진다.
환상의 여인 둘시네아에게 버림을 받은 돈키호테는 현실을 상징하는 '거울의 기사'에 비친 자신의 초라한 모습에 충격을 받고 쓰러진다.

▶ 산초를 대신한 알돈자

돈키호테는 천한 알돈자를 보자마자 왕족에게나 어울릴법한 구애의 대사와 노래를 늘어놓습니다. 세상사에 닳고 닳은 알돈자는 콧방귀를 뀝니다. 사랑의 증표를 요구하는 돈키호테의 편지에 빨다 만 걸레조각을 선물하는 식이지요. 싸움도 못하는 기사가 무슨 기사냐며 비아냥대던 알돈자. "이기고 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소. 오직 주어진 나의 길을 따를 뿐"이라고 답하는 돈키호테. "주어진 길?"이라고 되묻는 알돈자. 그때 흘러나오는 노래가 '이룰 수 없는 꿈'입니다. "그 꿈 이룰 수 없어도/ 싸움 이길 수 없어도/ 슬픔 견딜 수 없다 해도/ 길은 험하고 험해도/ 정의를 위해 싸우리라/ 사랑을 믿고 따르리라."

순간 알돈자가 흔들립니다. 비록 광기에 사로잡혔다 해도 그 노래에 담긴 일말의 진실에 마음이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패배한 적의 상처를 돌봐주는 것이 기사의 의무라는 돈키호테의 대의를 따르려다 돈키호테에게 당한 난봉꾼들의 화풀이 대상이 돼 무참하게 짓밟히고 맙니다. 다시 현실의 구정물을 온몸에 뒤집어 쓴 알돈자는 돈키호테에게 독설을 퍼붓습니다. "날 짓밟고 지나간 수많은 놈 중에/ 당신이 젤 잔인해/ 당신은 나를 절망으로 가득 채웠지/ 분노만 있었던 이 자리에/ 짓밟고 가는 건 참을 수 있으니/ 꿈꾸게 하지 좀 마."

환상의 여인 둘시네아에게도 버림을 받은 '슬픈 수염의 기사' 돈키호테 역시 현실을 상징하는 '거울의 기사'에 비친 자신의 초라한 모습에 충격을 받고 쓰러집니다. 대의와 명분을 중시하는 중세적 이상주의의 명백한 패배입니다. 연극은 거기서 끝나고 세르반테스는 재판을 받기 위해 지상으로 올라가야합니다. 죄수들은 결말에 불만을 느끼고 세르반테스에게 유죄를 선고하려합니다. 세르반테스는 즉흥극 형태로 또 다른 결말을 제시하고 죄수들의 격려 속에 감옥을 나섭니다. 죄수들의 대표가 말합니다. "내 생각엔 돈키호테가 곧 세르반테스 자네라고 생각되네."

마지막 장면의 키워드를 쥔 인물이 알돈자입니다. 알돈자는 비록 진흙 속에 묻혀있을지언정 연꽃과 같은 자신의 가치를 알아줄 누군가를 애타게 찾고 있는 하나의 몸짓이었습니다. 돈기호테는 그런 알돈자를 꽃으로 불러준 유일한 남자였습니다. 비록 광기에 사로잡힌 남자의 호명일지언정 그를 통해서 자신이 변모한 것을 깨달은 알돈자는 '내 이름은 둘시네아'라며 사그라지어가는 돈키호테의 열정을 되살려냅니다. 그래서 그들이 함께 부르는 '이룰 수 없는 꿈'은 감동적입니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에서 돈키호테는 잇속 챙기기 급급한 근대적 현실주의에 맞서 정의와 사랑의 가치를 지키려는 고결한 이상주의적 영웅으로 재탄생한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에서 돈키호테는 잇속 챙기기 급급한 근대적 현실주의에 맞서 정의와 사랑의 가치를 지키려는 고결한 이상주의적 영웅으로 재탄생한다.

▶ 중세를 풍자한 '돈키호테' vs 근대를 풍자한 '맨 오브 라만차'

최초의 근대적 소설로 불리는 '돈키호테'는 세르반테스의 말처럼 "당시 항간에 풍미했던 기사도 이야기의 권위와 인기를 타도하기 위해서" 쓰여 졌습니다. 소설은 대의와 명분을 앞세우면서 비현실적 환상에 매여 사는 귀족들을 매섭게 풍자합니다. 세상의 부정과 비리를 도려내고 학대당하는 사람들을 돕겠다던 돈키호테는 매번 자신이 도우려던 이들을 낭패에 빠뜨립니다. 그렇게 허무맹랑한 귀족 돈키호테가 중세적 광기와 몽상을 대변한다면 이해타산적이면서도 우직한 농부 산초는 현실주의와 합리주의로 무장한 근대적 민초를 상징합니다.

'맨 오브 라만차'에서 이런 구도는 역전됩니다. 돈키호테는 잇속 챙기기 급급한 근대적 현실주의에 맞서 정의와 사랑의 가치를 지키려는 고결한 이상주의적 영웅으로 재탄생합니다. 뮤지컬은 우직한 산초를 그 대척점에 놓을 수 없기에 비참한 현실에 고통 받는 알돈자를 그 짝으로 설정합니다. 돈키호테와 알돈자의 대립은 극예술이 요구하는 윤리적 갈등의 축과 뮤지컬이 요구하는 러브스토리의 구도를 동시에 구축합니다. 그렇지만 이상주의가 패배하고 현실주의가 승리하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기에 돈키호테의 정신적 승리의 순간을 육체적 패배인 죽음과 등치시킴으로써 '비극적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합니다.

물론 소설 '돈키호테'에는 앞에서 말한 두 가지 측면이 모두 다 담겼습니다. 돈키호테와 산초의 우스꽝스러움에는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는 중세 시대에 대한 매서운 풍자가 담겼지만 그들이 비통한 실패와 가혹한 패배를 맛보면서도 끝까지 용기와 희망을 버리지 않는 모습을 통해 인생에 있어서 고결한 이상의 중요성을 함께 역설하고 있습니다. 밀란 쿤데라가 서양근대 소설의 원조라 할 '돈키호테'를 그토록 극찬하는 이유도 이 작품이 정해진 해석의 틀을 항상 빠져나가는 묘미를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맨 오브 라만차'를 보고 '돈키호테'를 이해했노라고 쉽게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저 높고 우람한 성채의 탑 위에 정렬한 난쟁이들이 우리들의 도착을 알리며 부는 나팔소리를 들은 것에 불과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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