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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9년 6월 9일 02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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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제작한 방송 北으로 보내며 가족상봉 희망
“오늘 아침도 어김없이 떠오르는 해를 보고 간절히 빌었습니다. 그저, 죽기 전에 우리 부모 우리형제, 서로 만나 부둥켜안고 그간 못다 나눈 정을 나누게 해 달라고, 빌고 빈 지도 벌써 몇십 년… 같은 아픔을 갖고 있는 북녘의 형제자매 여러분. 부디 오늘 이 짧은 만남이 긴 추억으로 남지 않길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1∼5일 매일 오후 10시부터 10분간, 1만1640kHz 주파수를 맞춘 라디오에선 황긍원 씨(64)가 만든 방송이 흘러나왔다. 전북 정읍시에서 자영업을 하는 황 씨는 대북 단파방송 열린북한방송 ‘라디오남북친구’ 2기 회원으로 참여해 자신이 직접 제작한 방송을 북한에 송출했다.
인천 강화군이 고향인 황 씨의 소원은 아버지를 비롯해 가족을 만나는 것이다. 황 씨의 아버지는 6·25전쟁 때 행방불명됐고 외아들인 그는 어머니와 함께 40여 년을 보내야 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었지만 아버지와 형제자매 없이 자라는 게 늘 서러웠다. 어머니는 “그 난리 통에 죽지 않고서야 이렇게 무심할 사람이 아니다”며 “생전에 원 없이 제사라도 모시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결국 어머니는 아버지 소식조차 듣지 못하고 1993년 세상을 떠났다.
7년 뒤인 2000년, 황 씨는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앞두고 정부로부터 북한에 계신 아버지가 아들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버지 생신날을 정해 제사를 지내오던 황 씨는 아버지의 생존 소식만으로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최종 상봉 명단에는 포함되지 못했다.
“지금 생존해 계신다면 87세가 되셨을 겁니다. 비록 아버지와 상봉은 못했지만 아버지가 북에 살면서 생긴 형제자매들이 있을 수 있겠다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북녘 땅 어디엔가 살아있을 내형제들이여, 정말 그립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황 씨는 3월 우연히 인터넷을 통해 라디오남북친구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다. 방송제작 교육 등을 받기 위해 석 달 동안 매주 목요일 서울에 올라와 교육을 받고 다음 날 오전 3시경 정읍으로 돌아갔다. 어렵게 만들어진 황 씨의 첫 방송은 이렇게 시작됐다.
“지금 함께하는 이 시간 너무도 소중하고 귀해서 아마 죽어도 저는 잊지 못할 겁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얼굴도 잘 모르는 아버님과 헤어져 그리워한 지 벌써 60여 년, 이제는 그리움인지 미움인지도 모를 연민이 가득한 저의 얘기를 함께할까 합니다.”
간절한 소원이 담긴 황 씨의 음성이 전파를 타고 북녘 땅으로 넘어갔다.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