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아의 푸드 온 스크린] 사랑=라면? 달콤시 속 리얼리티

  • 입력 2008년 6월 20일 07시 45분


리얼리티가 좋은 드라마의 최고 덕목은 아니다. 하지만 리얼리티에 목숨을 건 감독이나 작가가 있는 드라마는 언제나 평균 이상의 감동을 선사한다. 그 집착이 세트나 소품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어서 감정과 연기, 서사까지도 힘을 발휘하다보니 어느 새 고개를 끄덕이고 나도 모르게 가슴 한 부분을 쓸어 내리게 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달콤한 나의 도시’는 근래 보기 드문 수작이고 역작이다. 연봉 2000 만원의 편집회사 대리인 오은수의 옷과 집은 물론 친구와 연애관까지 모두 다 그럴 듯 하다. 물론 연봉 2000 만원인 그녀가 마틴 싯봉의 재킷과 펜디 시계, 멀버리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은 ‘과연 카드 대금을 내면 월급이 남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모두 12개월 할부라면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집은 ‘달콤한 나의 도시’가 가진 리얼리티의 총아다. 그저 지저분하고 난장판인 분위기로만 몰고가는 기존 드라마의 노처녀 방과 달리 작은 소품과 구조까지 작정하고 부려 놓은 제작진의 노력이 눈에 들어온다. 예쁘게 해 놓고 살고 싶지만 편하게도 살고 싶어져 그러다 보면 이도 저도 아니게 되는 과년한 여자의 방을 제대로 꾸몄다.

값싸지만 기분은 그럴 듯한 와인 잔을 ‘테이크 잇’ 하라며 미국 바람 가득 든 장난을 하거나, ‘매트 매트 솔매트’로 저장된 남자 친구와 영하 9도의 화강암에서 비벼 주는 아이스트림을 나눠 먹는 장면은 정말 달콤한 요즘 여자들의 도시였다.

그리고 라면이 있었다. 그들이 원나잇 스탠드에 이르게 된 결정적 계기는 라면이었다. 모텔에서 사발면에 물을 부어 놓고 기다리는 그 3분이 ‘너무 길어’ 키스를 시작하고 결국 그 라면은 먹지도 못하고 불어터진 채로 그들의 머쓱한 아침을 함께 맞이하게 되었다. 왜 연하 남자와 얽히게 되는 은수들의 앞에는 라면이 있는 걸까?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도 은수로 분한 이영애는 특유의 목소리로 라면 먹고 가라며 유지태를 집으로 들였다. ‘달콤한 나의 도시’의 은수 역시 라면을 사들고 함께 들어 간 모텔에서 김이 들어차 헐겁게 접어 놓은 종이 뚜껑이 툭하고 열리기도 전에 마음도 몸도 열린다.

여기서 라면은 리얼리티의 정점이다. 위의 두 은수가 만약 “파스타 먹고 갈래요” 했다거나 라면에 물을 부어놓은 3분 대신 인스턴트 덮밥이 전자레인지 안에서 뎁혀지는 2분을 기다리기로 했다면 어땠을까?

라면은 ‘우주의 나이 140억년에 비하면 누나와 내 나이는 동갑이나 마찬가지’라는 일곱 살 연하 남자 연인과의 괴리를 단박에 좁히는 동 시대의 기호이고 따뜻한 훈기를 나누는 매개체고 소박한 음식을 갇혀있는 한 공간에서 먹는다는 친밀함의 상징이다.

라면은 참 하는 일이 많은 음식이다. 은유하는 바, 상징하는 바도 많은 놀라운 음식이다. 누구라도, 언제라도, 어디에서라도 라는 놀라운 포용력이 그 놀라움의 시작일 것이다.

사발면의 종이 뚜껑이 '툭'하고 열리며 훈기가 오르기 시작한 그들의 관계가 라면 같기를, 또 라면 같지 않기를 바란다.

조 경 아

세상사에 관심 많은 ‘호기심 대마왕’.

최근까지 잡지 ‘GQ’ ‘W’의

피처 디렉터로 활약하는 등,

12년째 왕성한 필력을 자랑하는

전방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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