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끄기’ 다큐멘터리 제작 이정욱 EBS PD

  • 입력 2005년 8월 31일 03시 06분


EBS 이정욱 PD는 “‘TV 끄기’는 습관적으로 TV를 보는 시청 행태를 바꾸고 시청자가 스스로 선택해 TV를 보기 위해 필요한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원대연 기자
EBS 이정욱 PD는 “‘TV 끄기’는 습관적으로 TV를 보는 시청 행태를 바꾸고 시청자가 스스로 선택해 TV를 보기 위해 필요한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원대연 기자
“‘TV 끄기’는 TV를 보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TV를 스스로 선택해 보자는 뜻입니다.”

‘TV 끄기’라는 새로운 소재의 다큐멘터리로 관심을 끌었던 EBS 이정욱(43) PD는 “TV 끄기는 TV에 대한 시청자의 주체성 회복”이라고 설명했다.

이 PD는 지난해 12월 국내 15가족의 TV 끄기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TV가 나를 본다’로 화제를 모았다. 7월에는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선진 5개국 50가정에서 ‘TV끄기’를, 인도네시아의 벽촌에서는 처음 TV를 보는 사람들의 반응을 촬영해 다큐멘터리 ‘TV와 인간’을 제작했다. ‘TV와 인간’은 31일 서울 강남구 도곡동 EBS 스페이스 홀에서 열리는 EBS 국제다큐멘터리페스티벌(EIDF)에서 상영된다.

○ TV… 더 많은 자극, 커지는 주목도

이 PD가 제작한 두 편의 다큐멘터리는 TV 스스로 ‘TV를 끈다’는 반역적인 실험을 한 점에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우리 국민의 TV 시청시간은 하루 평균 3시간입니다. 하지만 시청자는 투여한 시간만큼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는지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반복적, 습관적으로 TV를 보고 있어요.” 이 PD에 따르면 TV 시청 일주일 뒤에 본 내용을 물어보면 인상 깊은 몇 장면 외에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마저 유용한 정보인 경우는 거의 없다. 이런 현상은 책 신문 잡지 라디오 등 여러 매체 중 TV가 제일 심했다.

이 PD의 ‘TV 끄기’ 다큐멘터리 제작은 소박한 의문에서 시작됐다.

‘TV 방송국과 PD가 과연 TV라는 매체를 통해 시청자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있는가’라는 근본적 의문이었다.

“방송사와 종사자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시청자에게 필요 이상의 사탕을 주고 있습니다. 사탕이 아이들의 건강에 좋은지를 따지기 이전에 사탕을 많이 팔기 위해 더 달고 더 다양한 사탕을 만들어 시장에 내놓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그는 TV 제작자들이 보다 현란하고 자극적인 영상을 방송하는 것은 시청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시청자를 TV 앞에 오래 붙잡아 두기 위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람들은 소리가 나거나 뭔가 색다른 것이 보이면 반사적으로 거기에 관심을 집중하게 됩니다. TV의 장면전환 속도는 10년 전에 비해 최소 2배 이상은 빨라졌을 거예요. 장면 전환이 빨라지고 의상과 세트가 화려해지는 것은 시청자에게 반사적으로 TV를 보라고 강요하는 것과 같습니다.”

TV 중독에 대한 본격적인 국내 연구는 없지만 이 PD는 TV를 켜지 않으면 불안하고 한번 보기 시작하면 TV를 끄지 못하는 중증의 TV 중독자가 20% 이상 될 것이라고 추산했다. 더구나 국내외에서 벌인 실험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된 것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수록 TV 시청시간이 비례해서 늘어난다는 점이었다.


○ TV 끈 뒤 ‘왜 보았을까’ 스스로에 대한 질문 시작

TV를 ‘끊은’ 시청자들은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우선 집안이 무척 조용해진다. TV 시청하느라 미뤄왔던 청소 빨래 정리정돈 등을 하게 된다. 가족간의 대화도 늘어난다. 그러나 이 PD는 무엇보다 내가 왜 TV를 보는지에 대한 최소한의 자각이 생기는 것이 가장 중요한 변화였다고 지적한다.

“TV를 끊었다가 다시 본 사람들은 ‘왜 줄거리가 뻔한 드라마나 연예인이 말장난하는 오락 프로그램을 즐겨봤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합니다. 일부는 다시는 TV를 보지 않겠다고 하고 20%가량은 TV를 선택적으로 보겠다는 반응을 보이죠.”

이 PD는 오락 프로그램이 늘어나고 저질 선정 시비가 느는 데는 방송국뿐만 아니라 시청자의 책임도 있다고 지적했다. 시청자가 선택적으로 시청함으로써 좋은 프로그램이 방영되도록 하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1990년 입사한 이 PD는 그동안 ‘하나뿐인 지구’ 등 환경 다큐멘터리를 주로 만들어왔다. ‘TV가 나를 본다’는 5월 프랑스 칸에서 열린 TV프로그램 견본시장(MIP TV)에서 전 세계에서 출품된 1000여 편의 다큐멘터리 중 11위를 차지했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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