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6월25일 밤 마포경찰서장이 찾아왔습니다. 그때 저는 (가택연금 해제통보가 아니라) 남편을 연행하는 줄 알았죠. 남편은 들고 있던 수첩과 종이 몇 장을 제게 건넸고, 저는 그것을 숨기려고 화장실로 뛰어들어갔습니다….”
6.29선언 나흘 전. 김대중차기대통령의 부인 이희호여사는 당시 동교동 자택에 감돌았던 긴장의 순간을 이렇게 증언한다.
MBC 라디오(AM 900㎑) 정치다큐드라마 ‘격동 30년(매일 오전11.40)’이 현대 정치사에서 명암을 나눠온 정치 주역들의 목소리를 ‘채집’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지난해 7월부터 김윤환한나라당고문 박철언자민련부총재 김근태국민회의부총재 정승화전육군참모총장 장태완전수경사령관 등 21명이 녹음기 앞에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의 뒷얘기를 털어놓았다.
뉴스 등 보도 프로에 인터뷰 형식의 짧은 육성자료가 남아 있지만 실존 정치인의 역사증언 방송은 이례적인 일이다.
김승월PD는 “성우의 연기로 민감한 정치 상황을 묘사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 육성증언을 도입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목소리 채집의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주요 사건의 당사자들이 정치상황의 변화에 따라 불이익을 받거나 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증언을 꺼렸기 때문이다. 육성증언을 허락하고도 막상 민감한 대목에 이르면 녹음기를 ‘죽이는’ 경우도 많았다.
채집 성공률은 50% 미만. 김윤환고문은 이 프로를 녹음까지 해서 듣는 애청자라는 인연 때문에 쉽게 목소리 잡기에 성공했지만 다른 인물들에게는 대부분 삼고초려(三顧草廬)의 공을 들여야 했다.
5공시절 총리와 안기부장을 지낸 노신영씨가 대표적 인물. 그는 수십차례에 걸친 작가의 요청에 미안했던지 “차나 한잔 마시자”며 시간을 내줬다. 그러나 작가는 물론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인 제작진이 함께 방문해 집단 읍소로 육성증언을 받아냈다.
그러나 5공 관련인사는 대부분 스스로 금역(禁域)을 쌓았다. 자택이나 사무실을 몇차례 방문하고도 문전박대를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프로는 88년부터 10년째 방영중인 장수 프로이지만 민감한 역사와 현안을 다루고 있어 석연치 않은 이유로 방송이 중단되기도 하고 관련자의 항의를 받는 등 ‘외풍(外風)’에 시달리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래도 부동 청취자층의 지지와 격동의 세월을 전한다는 의지로 방송한다는 것이 제작진의 전언.
현재 방송중인 27화 ‘돌아온 대통령’편에서는 MBC 8기 출신의 신성호와 곽대홍이 전두환 노태우전대통령 역할을 각각 맡았고 김명수(DJ) 탁재인(YS) 김태훈(JP) 등이 목소리 연기를 펼치고 있다.
‘격동 30년’의 성공적 육성채집에 힘입어 MBC는 올해말 10대 기획의 하나로 3김(金)씨를 포함, 주요 정치인의 육성증언을 모아 ‘현대사 증언’을 방송할 예정이다.
〈김갑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