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NOW]
10, 20대 모델 전유물이던 패션쇼
50대 밀라 요보비치, 케이트 모스 등… 중장년 모델 통해 세대 경계 허물어
나이보다 개성 중시 소비자 늘어… 구매력 갖춘 40, 50대 겨냥한 전략
나이로 스타일을 구분하던 방식이 사라지면서 패션쇼 무대에 40, 50대 모델들이 적잖이 등장해 ‘에이지리스(나이에 얽매이지 않는)’ 트렌드를 연출하고 있다. 왼쪽 사진부터구찌 패션쇼 런웨이에 선 배우 케이트 모스, 가브리엘라 허스트 무대에 선 배우 로라 던, 톰 포드 패션쇼에 등장한 모델 스콧 반힐. 각 사 제공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나이의 통념에서 자유로워지기란 쉽지 않다. ‘나이에 맞게 입는다’는 건 대체 무엇을 의미할까. 청소년기 힙합 캐주얼을 즐기던 사람들이 중장년이 되었다고 해서 모두 원숙한 옷차림만 고집하게 되는 건 아닐 테다. 중요한 건 나이라는 생물학적 기준보다 자신만의 취향에 더 솔직해지는 일이다. 100세 시대를 맞은 지금, 패션계 역시 연령에 따라 옷을 구분하기보다 더 젊고 트렌디하게 입는 방식에 주목하고 있다.
그 변화는 런웨이에서 먼저 감지됐다. 한 컬렉션 안에 서로 다른 세대의 모델을 세우는 방식이 늘면서 성별이나 연령을 전제로 한 스타일 구분도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젊고 트렌디한 패션 하우스들이 시니어 모델을 전면에 내세우며 중장년도 충분히 멋질 수 있다는 사실을 역설하기 시작한 것. 가장 상징적인 사례는 셀린이다. 2015년 여름 시즌 광고 캠페인 모델로 당시 80세였던 패션잡지 ‘보그’의 에디터 출신 존 디디온을 기용하며 파장을 일으켰다. 시크한 올 블랙 룩에 은발로 등장한 그의 모습은 젊고 아름다운 모델에 열광하던 당시 패션계에 ‘세월의 미학’을 일깨운 결정적 장면으로 남았다. 구찌 역시 일반인에 가까운 시니어 뮤즈들을 지속적으로 런웨이에 등장시키며 “나이는 스타일의 조건이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해왔다.
2020년대 들어 이런 흐름은 더욱 본격화됐다. 이번 봄여름(S/S) 시즌만 봐도 그렇다. 세월의 흔적을 자연스럽게 드러낸 중년 모델들이 런웨이 전면에 대거 등장한 것이다. 미우미우는 가정부와 웨이트리스, 용접공 등 다양한 여성 노동자의 모습을 콘셉트로 한 이번 컬렉션에서 젊은 모델들 사이에 중년 배우와 아티스트를 자연스럽게 섞어 배치했다. 특히 1996년 미우미우 컬렉션을 호기롭게 걸었던 20대의 밀라 요보비치가 희끗한 머리와 깊어진 눈매로 다시 런웨이에 등장하며 전성기 시절보다 더 농익은 시크함을 드러냈다. 그 시절 생계를 위해 밤샘 작업을 마다하지 않던 여성들의 신선한 노동을 기리듯 앞치마를 두른 채 걸어 나온 48세의 배우 잔드라 휠러 역시 깊은 울림을 남겼다. 그런가 하면 가브리엘라 허스트의 컬렉션 오프닝은 배우 로라 던이 장식했다. 권위와 온기를 동시에 품은 드레시한 차림의 그는 “나는 빛나는 존재이고 살아 있는 보물이며 내 안의 무한한 용기를 존중한다”는 쇼 노트의 메시지를 가장 설득력 있게 전달했다. 톰 포드 컬렉션에서도 1990년대를 주름잡던 모델 에린 오코너와 스콧 반힐이 실크 슈트를 맞춰 입고 등장해 오랜 연인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다가오는 가을겨울(F/W) 시즌 역시 이런 흐름은 지속된다. 발렌시아가에서 최근 구찌로 옮긴 디자이너 뎀나 바잘리아는 데뷔 무대였던 이번 컬렉션에서 과거 구찌의 뮤즈였던 52세의 케이트 모스를 다시 무대에 세웠다. 화려한 스팽글 드레스와 날카로운 스틸레토 힐 차림으로 피날레 무대를 장식한 그는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묵직한 존재감을 증명했다. 실제 소비층을 반영하듯 최근 흐름을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낸 샤넬 역시 원숙한 모델들을 무대에 불러 세웠다. 쇼 오프닝으로 슈트 차림의 50대 모델 스테파니 카발리가 등장하며 숙련된 여성의 멋을 직관적으로 드러냈다. 이 외에도 오랜 시간 브랜드의 뮤즈로 활약한 57세의 크리스티 털링턴을 호출한 마이클 코어스, 레이철 파인스타인 같은 중장년 아티스트를 기용하며 서사를 이어 간 카롤리나 에레라 역시 지금의 분위기를 잘 보여 준 예다.
런웨이에 에이지리스(Ageless·나이에 얽매이지 않는) 트렌드 바람이 거세게 부는 건 과한 보정으로 개성을 감추고 디지털이라는 그림자 뒤에 숨는 데 익숙해진 젊은 세대들에 대한 반작용일지도 모른다. 동시에 런웨이를 빛낸 지금의 4050세대가 성숙한 안목과 경제력을 지닌 실제 소비층이라는 사실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에이지리스 트렌드는 단순히 어려 보이는 스타일을 흉내 내는 것과는 결이 다르다. 켜켜이 쌓인 연륜을 드러내며 젊은 세대 못지않게 트렌드를 즐기는 쿨한 태도에 가깝다. 우리가 말하는 가장 세련된 사람은 나이에 맞추기보다 나이를 이유로 스스로를 제한하지 않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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