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바지 차림 이웅열 “금수저 내려놓고 청년창업의 길 가겠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1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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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오롱 그룹회장직 사퇴 전격선언

28일 오전 서울 강서구 마곡지구 코오롱원앤온리타워에서 퇴임 선언을 한 이웅열 코오롱그룹 회장이 임직원들과 악수를 나누며 눈물을 글썽이고 있다. 코오롱그룹 제공
28일 오전 서울 강서구 마곡지구 코오롱원앤온리타워에서 퇴임 선언을 한 이웅열 코오롱그룹 회장이 임직원들과 악수를 나누며 눈물을 글썽이고 있다. 코오롱그룹 제공
28일 서울 강서구 코오롱원앤온리타워 강당. 수요일마다 정례 조회 형식으로 임직원 200명이 참석하는 성공퍼즐세션이 열렸다. 세션이 끝날 무렵 청바지에 검은색 터틀넥 스웨터를 입은 이웅열 코오롱그룹 회장이 강단에 올랐다. “질문 하나 할게요. 오늘 내 옷차림이 색다르죠?”

이 회장은 “지금부터 제 말씀을 듣게 되면 제가 왜 이렇게 입고 왔는지 이해가 되실 것”이라며 손수 적어온 A4용지 5장 분량의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저는 2019년 1월 1일자로 코오롱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날 것입니다. 대표이사 및 이사직도 그만두겠습니다. 앞으로 코오롱의 경영에는 관여하지 않을 것입니다. 회장님으로 불리는 것은 올해가 마지막이네요.”

1996년 1월 아버지 이동찬 명예회장의 자리를 이어 받아 23년 동안 그룹을 이끈 이 회장은 이날 이렇게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 출발에 나섰다. 사내 방송을 통해 이 장면을 생중계로 지켜보던 직원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 회장은 “마흔에 회장 자리에 올랐을 때 딱 20년만 코오롱의 운전대를 잡겠다고 다짐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3년이 더 흘렀다. 시불가실(時不可失·한 번 지난 때는 다시 오지 않으니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의미). 지금 아니면 새로운 도전의 용기를 내지 못할 것 같아 떠난다”며 사퇴 배경을 밝혔다.

이어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덕분에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하게 살아왔지만 그만큼 책임감의 무게도 느꼈다. 그동안 금수저를 물고 있느라 이가 다 금이 간 듯한데 이제 그 특권도, 책임감도 다 내려놓는다”며 “청년 이웅열로 돌아가 새로 창업의 길을 가겠다”고 밝혔다. 이 회장은 “누구나 한 번쯤은 넘어질 수 있어. 이제와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어”라는 가수 윤태규 씨의 ‘마이 웨이’ 가사를 읽어 내려갈 땐 눈물을 닦아 내기도 했다.

이 회장의 퇴임 결심은 발표 때까지 극소수 임원만 알 정도로 비밀에 부쳐졌다. 일부 그룹 계열사 사장들도 이날 발표를 통해 사퇴 소식을 접했다. 이 회장은 사퇴 의사를 일부 임원에게만 밝히면서 “아버지가 웅열이가 마흔 살이 되면 회장 자리를 물려주겠다고 주변에 말씀하실 때 아무도 믿지 않았지만 결국 행동에 옮기셨다. 이제라도 20년만 그룹을 이끈다던 다짐을 지키겠다”며 눈시울을 붉힌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이 회장의 조부인 고 이원만 코오롱 창업주는 1957년 회사 설립 후 20년 뒤인 1977년 고 이동찬 명예회장에게 회장직을 물려줬다. 이 명예회장도 73세이던 1995년 12월 기자회견을 열고 회장직에 오른 지 19년 만에 장남 이 회장에게 경영권을 승계한다고 밝혔다. 당시 정정했지만 “21세기를 앞둔 시점에 새로운 세대가 경영해야 한다”는 이유로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코오롱그룹 관계자는 “회장님이 연말 인사 명단을 보더니 ‘내가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 다 모르겠다. 이건 내가 변화를 못 따라가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평소 변화와 혁신을 강조하던 회장님이 역으로 퇴임을 표명해 조직 변화를 꾀하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회장 퇴임으로 향후 그룹 주요 정책 결정은 계열사 사장단이 참여하는 협의체 성격의 ‘원앤온리(One & Only)위원회’에서 논의된다. 이 회장의 아이디어로 신설된 위원회에는 이 회장의 장남 이규호 전무(34)도 참여해 ‘4세 경영 시대’를 예고했다. 이 전무는 이번 인사에서 3년 만에 전무로 승진해 핵심 계열사인 코오롱인더스트리 FnC부문 최고운영책임자(COO)로 패션사업을 총괄하게 됐다. 이 전무는 군 복무를 마친 2012년 코오롱인더스트리에 차장으로 입사했다. 당시 구미공장에서 현장 경험을 쌓으며 첫 경영 수업을 시작했다. 이후 2015년 ㈜코오롱 상무로 승진해 그룹 전략기획 업무를 맡으며 경영 일선에 더 깊숙이 관여했다.

코오롱 관계자는 “이 회장이 이 전무에게 그룹 경영권을 바로 물려주는 대신 그룹의 핵심 사업부문을 총괄 운영하고 협의체에 참여하도록 해 경영 수업을 받게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공석이 된 ㈜코오롱 대표이사 사장 자리엔 ㈜코오롱 유석진 대표이사 부사장이 내정됐다.

변종국 기자 bjk@donga.com
#코오롱#이웅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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