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단된 노동개혁… 뿌리산업, 남은 일자리마저 사라질 위기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2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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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고용절벽 온다]<中>1년 넘게 표류중인 노동4法

 
“임금피크제를 통해 절감된 재원을 청년고용에 활용한다. 고소득 임직원은 자율적으로 임금 인상을 자제하고 기업은 이에 상응하는 기여를 통해 청년고용을 확대토록 노력한다.”

 지난해 9월 15일 17년 만에 이뤄진 노동개혁 노사정(勞使政) 대타협 합의문에 담긴 내용이다. 비록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이 올해 ‘2대 지침(일반해고, 취업규칙 변경)’ 시행에 반발해 대타협을 파기했지만, 청년고용을 위한 ‘노력’과 ‘정신’까지는 파기하지 않았다.

 그동안 30대 기업의 80% 이상이 임금피크제를 시행했고, 정부 뜻대로 2대 지침이 시행된 지도 1년이 흘렀다. 하지만 청년 실업률은 외환위기 이후 사상 최악으로 치달았고, 내년에는 ‘일자리 절벽’까지 닥칠 위험성이 커지고 있다. 그런데도 시급한 노동개혁 4대 입법안은 9일 끝난 정기국회에서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여야정이 12월 임시국회에서라도 대타협 정신을 살려 노동개혁 입법 논의에 본격 착수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 뿌리산업까지 붕괴 위기

 행정고시에 낙방하고 뒤늦게 취업 전선에 뛰어든 이모 씨(32). 사립 명문대를 나오고, 4.0대의 학점과 900점대의 토익 점수에도 3년째 취업을 못 하고 있다. 요즘에는 걱정이 더 많아졌다. 내년도 대기업 정규직 채용 규모가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 때문이다.

 취업포털 사람인이 378개 기업을 조사한 결과 65.3%만 내년도 정규직 채용 계획이 있다고 답해 올해보다 4.8%포인트 감소했다. 채용방식 역시 수시(61.9%)가 공채(38.1%)보다 많았다.

 수도권에서 금형업체를 운영하는 박모 씨는 요즘 직원 구하는 데 애를 먹고 있다. 관련 기술자가 부족한 데다 제조업은 파견이 금지돼 있어 일감에 따라 탄력적으로 인력을 운용하기가 힘들다. 정부는 6개 뿌리산업을 육성하고 관련 일자리 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해 6개 업종에만 파견을 허용토록 하는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하지만 야당과 노동계는 제조업 파견 전면 활성화 의도라며 강력히 반대한다. 박 씨는 “국회가 싸우는 내용은 잘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사람 구하기가 너무 힘들고, 인건비 부담도 커지고 있다는 사실”이라며 “이렇게 가다간 뿌리산업 전체가 붕괴할 것”이라고 말했다.
○ 노동개혁 논의 않는 거대 야당

 정부가 근로기준법과 파견법 등 4개 노동개혁 법안을 국회에 처음으로 제출한 것은 지난해 9월 11일이다. 1년 3개월 넘게 흘렀지만 제대로 된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주당 최대 68시간인 근로시간을 52시간으로 줄여(근로기준법) 15만 개 이상의 일자리를 만들고 각종 사회안전망을 두껍게 한다는 것은 장밋빛 전망이었을 뿐 전혀 실현되지 않고 있다.

 노동 4법 논의가 중단된 것은 정부와 야당 모두에 책임이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부는 올해 1월 2대 지침을 야당, 노동계와 협의 없이 전격 시행하면서 야당과 노동계의 반발을 샀고, 급기야 한국노총의 대타협 파기로 이어졌다. 이때만 해도 정부는 내심 자신이 있었다. 4월 총선에서 여당이 압승하면 노동 4법의 국회 처리도 쉬울 것으로 예상했다. ‘총선 승리 후 국회선진화법 개정, 노동개혁법 처리’라는 장밋빛 시나리오도 이때부터 가동됐다.

 하지만 총선에서 여당이 참패하면서 상황이 뒤집혔다. 소관 상임위인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야당 의원(10명)이 여당(6명)보다 더 많아졌다. 야당 협조 없이는 법안 처리 자체가 불가능해진 것이다. 특히 정부는 끝까지 4개 법안의 동시 처리만 고집하면서 협상의 여지를 스스로 좁혔다. 환노위 관계자는 “하나하나씩 처리하면 되는데 정부가 너무 욕심을 부렸다”며 “그래서 여야 간 합의에 근접한 것도 처리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야당 역시 노동개혁 중단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4월 총선에서 국민들이 여소야대 구도를 만들어줬음에도 12월까지 노동개혁 관련 논의를 전혀 진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선진국들은 이미 4차 산업혁명에 들어갔는데 우리는 아직 후진적인 노동시장조차 개혁하지 못하고 있다”며 “노동개혁을 하루빨리 마무리 짓고, 미래지향적인 논의를 할 수 있도록 정치권이 결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행인 것은 최순실 게이트와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의결로 국정이 사실상 마비되면서 정부 역시 패키지 처리를 고집하지 않겠다는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야당도 파견법 이외의 3법에 대해서는 논의에 적극 나설 수 있다는 태도다. 환노위 관계자는 “파견법을 제외한 3법은 국회는 물론이고 학계에서도 오랜 기간 다뤄온 내용이라 마음만 먹으면 빨리 처리할 수도 있지만, 열쇠는 정부가 쥐고 있다”며 “야당도 일단 정부가 ‘한 수’만 접어주면 고용보험법 등 시급한 법률부터 통과에 협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유성열 기자 ryu@donga.com

※ 뿌리산업

주조 금형 용접 표면처리 소성가공 열처리 등 6개 기술을 활용해 사업을 하는 업종. 제조업 품질 경쟁력의 근간이 되는 산업이라는 뜻에서 ‘뿌리산업’이라 불린다.
#노동개혁#뿌리산업#일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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