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대규모 구조조정이 없었던 것과 비교하면 이례적이다. 불황이라고 하지만 금융위기 시절보다는 사정이 낫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기업들은 왜 지금 구조조정 카드를 꺼내든 것일까.
○ 장기불황에 체력 고갈된 기업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장기간 저성장 흐름이 이어지며 기업들이 한계에 몰린 것이란 지적이 많다. 경기 침체가 장기화하면서 피로가 누적돼 더이상 버티기 힘든 시점까지 몰린 기업들이 최후의 수단으로 구조조정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근속 3년 차 이상 직원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실시하기로 한 삼성증권의 김석 사장은 11일 사내방송을 통해 “현재와 같은 상황이 지속되면 회사 자체의 존립이 위협받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국내 증권사 62곳 중 45%인 28곳이 적자를 냈다. 지난해 순이익이 전년 대비 ‘반 토막’인 4조 원대로 떨어진 은행권과 어려움을 겪고 있는 보험업계도 지점을 줄이고 명예퇴직을 받고 있다.
근속 15년 차 이상 직원 2만3000여 명을 대상으로 명예퇴직을 실시하는 KT는 지난해 4분기 사상 처음으로 1494억 원의 영업적자를 내는 등 실적 부진에 시달리는 상황이다.
글로벌 경기 침체로 최근 수년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조선·항공·해운업계도 사업 매각과 인력 구조조정을 진행 중이다.
지난해 STX, 동양그룹이 구조조정을 늦추다 해체된 이후 정부도 기업 구조조정에 강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대규모 구조조정안을 내놓은 현대그룹과 동부그룹은 최근 금융당국으로부터 실행 속도를 높이라는 압력을 받고 있다.
전수봉 대한상공회의소 조사본부장은 “2008년 글로벌 대기업들이 대대적인 구조조정으로 사업을 재편하고 경쟁력을 확보했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았다”며 “최근 수년간 경기 침체가 이어져 오면서 기업들이 더이상 인력 구조조정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몰린 것”이라고 말했다.
○ 선제적 대응
주요 대기업들은 불확실한 대내외 경제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선제적으로 사업 구조조정에 나서고 있다. 미래를 낙관하기 힘든 상황인 만큼 수익성이 없는 사업은 매각이나 인수합병으로 정리한 다음 이를 통해 확보한 자원을 그룹의 핵심 경쟁력을 높이는 데 투입한다는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처음으로 계열사 통합 등 사업 구조조정을 진행 중인 삼성그룹이 대표적이다. 삼성 관계자는 “외환위기 당시에는 생존을 위해 사업을 내놓고 외자 유치를 받았다면 이번은 미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자발적인 구조조정”이라고 설명했다.
▼ “성장동력 못찾은 기업들 상시 구조조정 가능성” ▼
제약사인 드림파마와 한화L&C 건축자재 사업부문 매각에 나선 한화그룹도 수익성이나 경쟁력이 떨어지는 사업부문을 팔아 주력 계열사인 한화케미칼의 경쟁력을 강화할 계획이다. ○ 저성장 추세에 몸집 줄이기 이어질 듯
산업계 전반의 구조조정 움직임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란 게 많은 전문가의 관측이다. 기업들이 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저성장 추세가 당분간 이어질 것이란 우려가 큰 만큼 위기에 대비해 몸집을 가볍게 할 것이란 분석인 것이다.
지난달 취임한 권오준 포스코 회장은 취임 이후 첫 기자간담회에서 “테이블에 올라 있는 수십 개의 신사업을 비판적 관점에서 전면 재검토하겠다”며 사업 구조조정에 대한 의지를 밝혔다. 무분별하게 늘어난 신규 사업을 정리하고 철강 본연의 경쟁력 강화에 집중하겠다는 뜻이다.
황인학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대부분 산업이 성숙단계를 넘어 정체단계에 접어든 상황에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지 못한 기업들이 사업 포트폴리오 재편이나 인력 구조조정을 상시적으로 할 가능성이 크다”며 “올해에 금융업종이 주도를 했다면 내년엔 또 다른 업종이 주도를 하는 식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배상근 전국경제인연합회 경제본부장은 “구조조정을 통해 기업의 경쟁력이 한 단계 높아질 수 있는 만큼 구조조정 자체를 나쁘게만 볼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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