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이진석 기자의 Car in the Film]두부 배달차, 신형 스포츠카로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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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1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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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타 AE86 스프린터 트레노/ 이니셜D


평범한 고등학생이 밤이면 산길을 질주하는 ‘스트리트 레이서’가 되어 도전자들을 차례로 쓰러뜨려 나갑니다. 이 도시괴담 같은 소재로 일본 자동차 마니아들을 14년째 열광에 빠뜨리고 있는 작품이 있습니다. 만화가 시게노 슈이치(しげの秀一)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 ‘이니셜D’입니다.

두부가게의 외아들인 주인공 후지와라 타쿠미(藤原拓海)는 중학생 때부터 아버지를 도와 자동차로 새벽 배달을 하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 놀라운 운전기술을 몸에 익혀갑니다. 문짝에 두부가게의 상호가 적힌 낡은 배달차는 도요타가 1983∼1987년 생산한 소형 스포츠카 ‘AE86 스프린터 트레노(사진)’. 누구나 탈 수 있는 스포츠카를 목표로 개발한 도요타의 명차입니다.

늘 세상사에 무관심한 듯 멍한 표정. 어느새 몸에 배어든 운전 실력도, 차의 잠재력도 알지 못하던 타쿠미는 산길에서 우연히 아마추어 레이서와 맞붙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천재 레이서의 본능에 불이 붙습니다. 10년도 넘은 낡은 차로 최신형 스포츠카를 꺾어가는 타쿠미의 모습은 시청자들에게 묘한 쾌감을 안겨줍니다. 다소 비현실적인 설정이지만 원작자의 자동차에 대한 방대한 지식과 치밀한 묘사가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줍니다. 자동차의 배틀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유로비트는 TV 앞을 박차고 나가 당장이라도 차의 시동을 걸고 싶다는 충동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니셜D는 단순한 인기 만화를 넘어 자동차업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방영 직후 일본의 ‘하시리야(走り屋·공공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마니아)’들을 들끓게 하며 자동차 튜닝 시장의 활성화에 기여했고, 일본 주요 자동차업체들은 저마다 스포츠카 개발에 열을 올렸으며 소위 ‘이니셜D 키즈’라 불리는 젊은 프로 카레이서들이 탄생하는 배경이 됐습니다.

작품 배경으로 등장하는 이로하자카(いろは坂) 언덕이나 아카기(赤城)산에서 자동차 묘기를 따라하는 운전자들의 사고가 속출하는 해프닝도 생겼지만, 자동차를 고쳐 타고 운전을 즐길 줄 아는 문화를 만들어냈다는 점은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합니다.

작품의 인기에 힘입어 이니셜D는 2005년 홍콩에서 영화로 제작되었고 이달 초부터는 일본에서 애니메이션 5번째 시리즈의 방영이 시작됐습니다. 현지에서 45권까지 발간된 원작 만화책은 누적 판매부수가 5000만 부에 달합니다. 이니셜D의 인기는 자동차회사의 신차 개발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도요타는 올해 작품 속 주인공의 자동차인 ‘AE86’에서 이름을 따온 신형 스포츠카 ‘86’을 출시했습니다. 한국 자동차마니아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마냥 부럽기만 합니다.

이진석 기자 gen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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