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국 하림그룹 회장은 “한 번 어려움을 겪는 것이 4년제 대학을 나온 것보다 월등히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성남=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 기차에서 내려 이리역(현 전북 익산역) 광장으로 나가자 부모님이 서 계셨다. 무작정 집을 나와 목포행 완행열차를 탄 지 4, 5일 됐을까. 유달산을 올랐다 내렸다 하며 빈둥대다 돌아온 참이었다. 연고 없는 목포에서 더이상 할 일도 없었다. 가출했던 중학교 3학년 셋째 아들을 앞세워 부모님은 자식의 담임선생님 집으로 향했다. “이 아이 뜻대로 농고(農高)에 보내겠습니다.” 좌우간 인문계 고교에 진학해야 한다고 고집하던 분들이었다. 마당 한쪽에서 닭과 돼지를 치는 아들을 보며 “저놈, 커서 뭐가 되려고…” 하며 혀를 차던 어른들이 마침내 백기를 들었다. 이날 이후 김홍국(55·하림그룹 회장)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자신이 발견한 적성의 길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 ○ 꼬마 사장
시작은 외할머니가 안겨준 병아리 여남은 마리였다. 열두 살 여름방학 때 받아온 병아리를 키우는 재미가 쏠쏠했다. 논에서 개구리와 미꾸라지를 잡아다 삶고 거기에 뜯어온 뚝새풀을 성둥성둥 잘라 넣고 쌀겨와 버무리면 좋은 사료가 됐다. 그때 병아리 한 마리에 7원. 그 병아리를 키운 닭은 250원을 쳐줬다. 여남은 마리 병아리를 키워 팔았더니 2500원이 생겼다. 다시 병아리 100마리를 사고도 1800원이 남았다.
“다 남는 거 아니겠어요. 인건비가 나갑니까, 사료비가 나갑니까. 돈이 금방금방 벌리더라고요.”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헌 슬레이트 조각들로 얼기설기 돼지마구를 만들고 돼지도 키웠다. 새벽 5시에 일어나 6km가량 떨어진 물엿공장으로 리어카를 끌고 갔다. 물엿을 만들 때 나오는 곡물 찌끼를 얻어 싣고 돌아와서는 돼지에게 먹이고 학교에 갔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저 그 일이 좋아서 무조건 했다. 그러나 부모님에게는 말 안 듣는 문제아였다. 어머니는 6남매 중 삼남인 그에게 “다른 형제 다섯 키우는 것보다 너 하나 키우는 게 더 힘들다”고 말하곤 했다.
이리농림고(현 익산대)를 다닐 때는 시쳇말로 잘나갔다. 수업을 하고 있으면 복도에서 그를 찾아 서성대는 아저씨가 있기도 했다. 그가 닭을 키우는 농장의 총무 책임자가 결재를 받으러 온 것이었다. 그의 ‘회사’에는 어른 직원이 10명 정도 있었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그가 벌어들이는 돈이 당시 학교 선생님 봉급의 10배가량 됐다. 일개 군에 서너 대 있을까 말까 한 250cc 오토바이를 타고 학교에 다녔다.
“적성에 맞는 일을 하는 건 좀 과장되게 이야기하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노는 거예요. 일을 해도 재미있는 거죠.”
그렇게 신나게 일을 하면서 졸업할 때 만 열여덟의 나이로 다른 성인의 보증을 받아 사업자등록을 했다. 정식 회사를 차린 것이다. 동네에서는 닭 수만 마리를 키우는 그를 ‘꼬마 사장’이라고 불렀다. 그가 졸업한 뒤에도 고교 교장선생님은 월요일 조회시간마다 전교생에게 “너희 선배 중에 김홍국이라고 있는데…” 하며 그의 성공담을 몇 년이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당시 그의 수중에는 현금으로만 4000만 원이 있었다. 익산에서 단독주택 1채 값이 200만∼300만 원 할 때였다. 닭과 돼지를 기르는 일 말고 다른 직업이나 사업에 눈을 돌릴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젊은 혈기는 그를 방황하게 했다. 현대자동차의 첫 국산 승용차인 포니가 나올 무렵이었다. 선팅을 까맣게 한 고교 선배의 포니를 타고 밤이면 요정으로 향하는 일이 잦았다. 월 5% 이자를 물며 장리 빚을 내고 사업을 키웠다. 그렇게 3년쯤 되던 때였다. 닭과 돼지 가격이 잇따라 폭락했다.
“어느 날 보니까 쫄딱 망해 있더라고요. 빚만 남아 있었어요.” 그에게 찾아온 첫 번째 어려움이었다.
○ 어려움은 축복
빚쟁이들이 집으로 찾아오면 그는 돼지마구에 누워서 피했다. 그 더러운 돼지마구에 설마 사람이 숨어 있겠어, 하며 그들은 돌아가곤 했다.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면 ‘다시 할 수 있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피곤한 몸으로 밤에 들어오면 후회스럽기만 했다. ‘내가 왜 이 길을 택했나. 정말 울려고 내가 왔던가.’ 요정에서 작부(酌婦) 끼고 젓가락으로 상을 두드리며 불렀던 노래 ‘선창’의 가사가 자신의 신세가 돼 버렸다.
“이상하게도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않았어요. 모든 것은 다 내 책임이라고 생각했지요. 내가 잘못하는 거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빚을 갚는 데 2년이 걸렸다. 교직에 있던 형님들이 ‘동생이 빚을 못 갚으면 대신 갚아주겠다’는 보증을 서줬다. 그 대신 빚쟁이들은 이자를 당분간 받지 않겠다고 해줬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또 지게질을 하고 리어카를 끌었다. 새벽 댓바람에 일어나 다른 사람이 아침을 먹을 무렵에 한나절 할 일을 미리 해뒀다.
사업을 다시 일으키려 애쓸 때 서울에 갈 일이 있으면 형수에게서 5000원을 받았다. 당시 익산에서 서울까지 고속버스 요금은 왕복 3600원. 나머지 1400원으로 서울에서 쓸 교통비와 잡비를 충당하고 돈이 남으면 라면이라도 먹는 것이었고, 없으면 쫄쫄 굶을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라면 사먹을 돈이 안 남더라고요. 밤에 익산시외버스터미널을 빠져나오는데 길가 식당에서 삼겹살 굽는 냄새가 나는 거예요. 그게 그렇게 먹고 싶은 거야. 아이고, 지금도 그 냄새가 머릿속에 있어요.”
이후 사업은 무섭게 성장했다. 그가 서른 살을 넘었을 때 키우는 닭은 수십만 마리에 달했다. 하루 매출이 1000만 원을 넘었다. 그런 날들이 몇 개월을 갔다. ‘김일성이 돈을 대 준다더라’는 유언비어까지 나올 정도였다. 믿기지가 않았다. 사무실 문을 걸어 잠그고 허벅지를 꼬집어 봤다. 아팠다. 공부를 많이 하지도 않은 ‘시골 무지렁이’가 어떻게 일을 이렇게 잘할 수 있을까. 역시 적성에 맞는 일을 자신이 하고 있다는 걸 새삼 확인하게 됐다.
그가 세운 하림그룹은 그동안 어려움을 겪고 난 뒤에 급성장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1990년대 초 ㈜하림을 만들 때가 그랬고, 1997년 외환위기로 휘청거릴 때도 그랬다.
그러나 지금도 이야기를 하면 그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때는 2003년이다. 익산시 망성면에 세운 동양 최대의 도계(屠鷄)·가공공장이 화재로 전소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해 조류인플루엔자가 휩쓸고 지나갔다. 닭을 잃었고, 시장을 잃었다. 밤에 자려고 누워도 3시간 정도 자고 나면 어김없이 눈이 떠졌다. 이불과 요는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온갖 공상이 머릿속에서 떠돌았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교회로 향했다. 아내가 뒤따랐다. 그렇게 몇 개월 동안 새벽기도를 다녔다. 그것밖에 남은 게 없었다.
“나중에 집사람한테 물어봤어요. 왜 그렇게 교회를 악착같이 따라왔느냐고. 집사람이 그러더라고요. 안 그러면 내가 자살할 것 같았다고. 허 참….”
하림그룹은 2년 뒤 사상 최대 흑자를 기록했다. 그는 어려움을 축복이라고 했다. 물론 그도 어려움 자체는 겁나고 싫다. 그러나 어려움이란 피해가거나 다른 사람과 환경을 원망하지 않고, 이겨내는 게 중요하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 원칙과 기본
김홍국은 자신의 자식 4명을 하림그룹에 얼씬도 못하게 한다는 철학을 갖고 있다. 스스로 직장을 잡아서 서운한 일, 억울한 일도 당해보고 때로는 귀싸대기도 맞으면서 자생력을 키우라는 뜻이다. 그러다 쓸 만하다 싶을 때 자신의 회사로 스카우트하겠다는 속내다. 쓸 만하지 않으면? “그럼 스카우트 못하지요.”
그는 원칙과 기본대로 살았다고 자부한다. 비자금 같은 건 생각도 안 해봤다. 은행과의 약속은 한 번 어긴 적이 없다. 가장 든든한 백은 법과 원칙이라고 믿고 있다. 법과 원칙을 지키는 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나중에 보면 가장 빠른 지름길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섰을 때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직을 제의 받았지만 그는 거절했다. 이 대통령이 “젊은 사람이 못쓰겠구먼. 나라를 위해 봉사할 생각을 해야지, 자기 사업 생각만 하느냐”고 질책했지만 그는 버텼다. “나는 죽을 때까지 이 일만 할 겁니다. 내 소명(召命)이에요. ‘너는 이 일만 해라’ 하고 태어난 거예요. 행복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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