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고기온이 30도를 넘었던 8일 서울 성북구의 한 가전제품 매장. 입구에는 ‘에어컨 특판’ ‘파격 할인’ 등의 문구가 담긴 현수막이 내걸렸지만 구입하는 고객은 드물었다. 매장 종업원은 “가격만 물어보고 나가는 손님이 많다”며 “매출도 지난해의 절반가량으로 줄었다”고 설명했다. 많은 비로 불쾌함을 느낄 만큼 습도가 높았던 5일 오후 서울 광진구 구의동 테크노마트 역시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유동인구가 많은 점심시간인데도 1, 2층의 에어컨 매장을 둘러보는 고객은 서너 명에 불과했다. 》 제품을 살펴보던 장병규 씨(47)는 “사무실에 놓을 에어컨을 사러 왔는데 100만 원을 훌쩍 넘는 가격과 전기요금 때문에 망설여진다”고 말했다.
○ 여름인데 에어컨이 안 팔린다
대표적인 여름 가전제품인 에어컨 수요가 눈에 띄게 줄었다. 동아일보가 입수한 한 가전업체의 조사 자료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국내 에어컨 시장 규모는 연평균 165만 대 안팎. 유난히 더웠던 지난해에는 예년보다 많은 190만 대가 팔려나갔다. 한반도가 점차 아열대 기후로 변하고 있다는 분석도 판매에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올해는 다르다. 서울의 6월 평균 기온이 104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고 이달에도 덥거나 습도가 높은 날이 이어지고 있지만 수요는 지난해 동기 대비 30∼40% 줄었다는 게 유통업계의 설명이다.
이마트는 4∼6월 에어컨 판매량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5.3%나 줄었다. 가전업계는 올해 판매량이 90만∼120만 대 수준으로 떨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일부에서는 100만 대 선이 깨질 수도 있다고 예상한다.
○ 짠물 소비-전기요금 폭탄 ‘이중고’
판매 감소의 주된 이유로는 경기 침체가 꼽힌다. 허리띠를 최대한 졸라매는 ‘짠물 소비’를 하는 요즘, 에어컨을 사기 위해 150만∼300만 원의 돈을 쓰는 소비자는 드물다는 것. 테크노마트에서 에어컨을 살펴보던 박선영 씨(52)는 “신제품은 디자인이 예쁘지만 가격이 생각보다 비싸다”며 “그냥 12년 전에 산 제품을 계속 쓸 생각”이라고 말했다.
전기요금 ‘폭탄’을 걱정하는 소비자도 많다. 전기요금은 사용량이 많아질수록 단위당 요금이 높아지는 누진체계가 적용되는데 전기료는 계속 인상되고 있다. 절전 기능이 강화된 에어컨이 그나마 전기료 부담을 줄일 수 있지만 기존 제품보다 20만∼30만 원가량 비싸다는 점이 걸림돌이다.
가정용 에어컨의 신규 수요가 한계에 달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최근 지어진 주상복합 건물의 경우 처음부터 빌트인 방식으로 에어컨이 설치돼 있으며, 중앙 냉난방식 주거공간도 늘고 있다. 위니아만도 관계자는 “가정에 에어컨 보급률이 높아 신규 수요가 많지 않다”며 “2, 3년 전부터 에어컨 판매는 교체 수요가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말했다.
○ 하반기 전망도 불투명
가전업계와 유통업계는 7∼9월 더위에 기대를 걸고 있다. 지난해에도 9월까지 계속된 무더위로 여름 막바지까지 에어컨이 불티나게 팔렸기 때문이다. 하이마트 관계자는 “더위가 생각보다 길어지면 에어컨을 찾는 고객도 늘어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사회 분위기가 우호적이지 않다. 정부는 지난해 블랙아웃(대규모 동시 정전)사태의 위기를 겪은 뒤로 전기 사용 자제를 촉구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한국전력도 전기 요금 인상을 추진 중이다. 하반기에 경기 침체가 더 깊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냉방병 등 건강을 생각해서 아예 에어컨 없이 여름을 보내려는 가정도 늘고 있다. 대신 선풍기와 함께 사용해 더위를 덜어주는 제습기 판매가 늘고 있다. 2009년 4만 대가 팔린 국내 제습기 시장은 올해 최대 50만 대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LG전자 관계자는 “지금으로서는 하반기를 예측하기 쉽지 않다”며 “경기가 살아나지 않고 에어컨이 ‘전기 먹는 하마’라는 오명(汚名)을 벗지 못한다면 당분간은 큰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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