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 큰 승객 “덥다” 항의하면 에어컨 더 세게
온도규정 없어 과잉냉방 빈번…서울 형광등 254만개 켜는 셈
위 사진은 해당 기사와 관련 없음
승객이 꽉 들어찬 출퇴근 시간대를 제외하면 누구나 한 번쯤은 ‘냉장고 지하철’에 올라타 본 경험이 있을 법하다. 최근 전력수급 비상으로 ‘블랙아웃’(대규모 정전사태) 경고가 이어지면서 지상의 공공기관과 대형 건물은 실내온도를 통제하고 있지만 정작 지하에서는 지상의 열기를 비웃기라도 하듯 한기(寒氣) 가득한 열차가 달리고 있다.
서울지하철 5∼8호선을 운영하는 서울시도시철도공사는 전동차 총 1561량을 운행한다. 전동차 1량에 에어컨을 켤 때 들어가는 시간당 소비전력은 21kW. 소비전력 32Wh짜리 형광등 656개를 켰을 때와 같다. 전체 5∼8호선 전동차의 냉방 소비전력을 모두 더하면 형광등 102만4016개를 켜놓은 셈이다.
서울지하철 1∼4호선에는 이보다 많은 1954량의 전동차가 달린다. 1∼4호선을 운영하는 서울메트로는 전동차 1량 냉방에 쓰는 시간당 소비전력을 평균 23kW로 본다. 전체 열차의 냉방 소비전력량은 형광등 140만4926개를 켠 것과 같다. 9호선은 열차 수는 144량으로 가장 적지만 열차당 소비전력량은 시간당 25kW로 가장 높다. 지하철 1호선부터 9호선까지 모든 열차가 냉방을 가동하면 형광등 254만1262개를 켰을 때의 전력이 사용된다.
이처럼 매일 땅속에서도 만만치 않은 전력이 쓰이고 있지만 정작 지상에 적용되는 엄격한 잣대는 없다. 블랙아웃에 대비해 최근 공공기관의 실내온도는 28도 이상으로, 백화점과 호텔 등 대형 상업용 건물의 냉방온도는 26도로 제한됐지만 지하철에는 제한 규정이 없다. ‘실외온도가 26도 이상일 때 냉방을 가동하라’는 간단한 지침뿐이다.
서울메트로와 도시철도공사는 평상시 약냉방 칸으로 지정된 열차 두 량은 26도로 유지하고 나머지 칸은 24도 이하로 운영한다. 이마저도 승객 민원에 따라 더 낮아지기도 한다. 서울메트로와 도시철도공사가 운영하는 콜센터(1577-1234, 1577-5678)로 ‘춥다’ 또는 ‘덥다’는 항의가 실시간으로 폭주하기 때문이다.
이달 13일부터 19일까지 도시철도공사로 걸려온 ‘덥다’는 민원 전화 및 메시지는 총 1667건. 날씨와 요일별로 편차는 있지만 하루 평균 240건 정도가 걸려오는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기간 ‘춥다’는 민원도 823건에 달했다. 공사는 같은 열차 내에서 5분 동안 2, 3건의 동일 민원이 들어올 경우 에어컨을 끄거나 켠다.
지난해 냉난방 민원 7만6181건을 접수한 서울메트로도 고민 중이다. 지난 한 달 동안만 7753건을 접수했다. 동시에 온도를 낮춰 달라, 또는 올려 달라는 민원이 이어지다 보니 중간에 낀 기관사가 안내방송으로 승객들에게 하소연하는 일도 있었다. 지난해 5월 오후 2시경 지하철 2호선에서 기관사 김하령 씨(52)는 ‘덥다’는 민원에 냉방을 가동했다가 곧바로 ‘춥다’는 민원을 받고 난감해진 나머지 안내방송으로 “덥다는 민원이 들어와서 냉방을 가동했는데 이번에는 춥다고 하시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고 했다.
24도 이하인데도 승객이 연이어 덥다고 하면 계속 온도를 낮추는 통에 ‘냉장 열차’가 탄생하고, 한기를 느낀 승객이 불평하면 에어컨을 끄는 악순환이 꼬리를 문다. 승객 요구에 따라 에어컨 끄기와 켜기를 반복하는 사이 에너지가 줄줄 새는 현장이다.
전문가들은 “지하철은 기차와 달리 도심 내 짧은 거리를 이동하는 승객들이 주로 이용하는 교통수단인 만큼 냉난방과 관련해 더 엄격한 규정을 적용하는 한편 승객들도 순간의 편안함보다 에너지 절약을 선택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김재철 숭실대 전기공학부 교수는 “시간대별로 승객이 많을 때와 적을 때를 구분해 냉방을 가동해야 한다. 오후 2시부터 5시 사이 전력 사용량이 가장 많은데 지하철은 오히려 이 때 승객이 별로 많지 않은 만큼 실내 온도를 높여도 괜찮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임재규 에너지경제연구원 에너지절약정책연구실장은 “에너지 절약에 동참한다는 의식이 관건”이라며 “다 함께 조금만 참자는 안내방송과 홍보영상을 열차 내에 틀어 승객들에게 공감을 얻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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