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山中명품’ 중장년층 홀리다

■ 고가 아웃도어 시장 급성장

11일 오전 서울 도봉구 도봉산 입구의 풍경. 등산로 초입에 각종 아웃도어 의류 매장이 즐비하다. 화려한 색상과 디자인의 아웃도어 의류를 갖춰 입은 등산객들이 무리 지어 걷고 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지난해 은퇴한 김모 씨(62·경기 의정부시)는 요즘 캐나다 아웃도어(야외활동) 브랜드 아크테릭스에 푹 빠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풀세트’로 장만하자면 수백만 원이 들지만 아깝지 않다는 게 김 씨의 생각이다. 등산은 물론이고 각종 모임에서도 입을 수 있어 활용도가 높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보다는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이 브랜드를 ‘알아주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자신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지는 게 더 큰 이유다.

○ 어른들의 ‘유니폼’

급속도로 팽창하는 아웃도어 패션시장의 뒤에는 중장년층이 버티고 있다. 아웃도어 의류가 어른들의 일상복으로 자리 잡으며 10대의 노스페이스 못지않게 재력과 취향 등을 드러내는 도구가 된 것이다. 불과 5, 6년 전 검은색 등산복만 입었던 중장년층은 점점 고급스럽고 다양해지는 아웃도어 의류를 통해 남과 다르게 보이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고 있다.

최근에는 코오롱스포츠, K2, 블랙야크 등 국내 브랜드뿐 아니라 재킷 하나에 70만∼80만 원을 호가하는 아크테릭스, 몬추라, 마무트 등 해외 브랜드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이 브랜드들은 호주머니가 얇은 젊은 층보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40∼60대가 주로 산다. 2002년 국내 판매를 시작한 아크테릭스는 첫해 20억 원에 그쳤던 매출액이 지난해 250억 원을 넘어섰다. 아크테릭스 관계자는 “판매 초기에는 ‘(우리 제품의) 가격이 미쳤다’는 소릴 들었지만 요즘에는 값이 비싸도 옷이 좋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고객이 많다”고 말했다.

이런 현상에 대해 고려대 한성렬 교수(심리학)는 “인생의 절정을 막 지난 중년들이 산에서 고가 등산복을 입는 것은 아직 자신이 재정적으로 여유 있고 육체도 젊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과시하고 인정받고 싶다는 뜻”이라고 분석했다.

아웃도어 제품에 아낌없이 돈을 쓰는 중장년층 덕분에 2006년 1조2000억 원이었던 국내 아웃도어 패션시장 규모는 지난해 4조3700억 원에 이르렀다. 올해는 5조 원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 ‘깔맞춤’ 바람(風)패션

아웃도어 의류를 자주 입는 중년 남성들은 브랜드 충성도가 높아 한 가지 브랜드에 마음을 빼앗기면 반복 구매하는 성향을 보인다. 이런 독특한 소비습관이 아웃도어 시장을 키우는 데 한몫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가지 브랜드로 장식하는 것에 빗대 ‘깔맞춤 패션’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각종 산악회로 대변되는 집단적 등산 및 레저 문화도 고가 아웃도어 시장의 팽창에 기여했다. 국내 유명 산들이 ‘로맨스그레이(연애하는 중년)’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면서 산 입구 아웃도어 의류매장에서 데이트 상대에게 값비싼 제품을 사주는 풍경도 흔하다.

도봉산의 한 등산복 매장 점주는 “부부로 보이지 않는 고객들은 상대에게 잘 보이려고 제품을 살 때 통이 큰데 배우자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인지 현금 구매를 선호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한 의류업체 관계자는 “‘어느 정도 등급이 되는 브랜드 등산복을 입지 않으면 남자가 손도 안 잡아준다’ ‘불륜이 아웃도어 시장을 키웠다’는 말도 있다”고 전했다.

아웃도어 의류 시장이 커지자 서울의 청계산 북한산 도봉산 입구에는 오래된 식당들을 밀어내고 아웃도어용품 매장이 줄줄이 들어서고 있다. 30여 개의 매장이 들어선 도봉산 입구 주변의 매장 임대료는 최근 3년 사이 약 3배로 올랐다.

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