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50여 년 만에 최악의 가뭄으로 주요 곡물 수출을 전면 중단하면서 곡물 가격이 치솟고, 국제사회의 이란 제재 움직임으로 원유 가격도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국내에서는 정부가 전기와 도시가스 요금을 올린 데 이어 지방자치단체들이 공공요금 인상에 가세하고 있어 서민들의 물가 부담이 커지고 있다. 이처럼 하반기에 물가 상승을 예고하는 대내외 악재들이 쓰나미처럼 몰려오자 정부의 물가안정 대책에도 비상등이 켜졌다. ●러시아발(發) 애그플레이션 우려
러시아가 수확량 감소에 따라 밀과 보리, 호밀 옥수수 밀가루 수출을 연말까지 중단하기로 5일 발표하자 미국 시카고상품거래소에서 밀 선물(先物)가격은 1부셸(27.2㎏)에 7.8575달러로 치솟았다. 이는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인 2008년 8월 이후 최고치다.
6일에는 다시 7.2575달러로 떨어지긴 했지만 최근 국제 밀 가격은 고공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특히 세계 3대 밀 수출국인 러시아의 이상고온 현상이 지속되고 투기세력까지 가담하면서 최근 2개월 간 밀 가격이 80% 넘게 치솟아 2008년 지구촌을 덮쳤던 애그플레이션(농산물 값 급등으로 인한 물가 상승)의 악몽이 재현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이에 따라 최근 설탕값 인상에 이어 라면 과자 국수 등 일반 가공식품의 필수 원료인 밀가루 가격도 오를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제분업체 관계자는 "11월 초까진 업체마다 재고가 있기 때문에 즉각 올리지는 않을 것"이라면서도 "당장 9일부터 구매하는 물량은 높은 가격을 지불할 수밖에 없어 11월 이후 가격 인상 요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제분업계는 그동안 미국 호주 캐나다 등으로부터 밀을 수입해왔기 때문에 이번 러시아의 수출 중단에 따른 직접적인 타격은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집트를 포함해 러시아에서 수입을 했던 국가들이 수입선을 미국 등으로 바꿀 경우 국제 밀 가격 급등세가 본격화해 연쇄 타격을 받을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이란 리스크로 원자재값도 들썩
사실상 전량을 해외 수입에 의존하는 원유 가격의 상승세도 가파르다. 특히 미국이 주도하는 이란 제재 움직임이 구체화하면서 상승세도 더욱 뚜렷해졌다. 한국이 주로 수입하는 중동산 원유의 기준가격인 두바이유 현물가격은 5일 배럴당 78.59달러로 28일부터 6일 연속(거래일 기준) 오른 뒤 6일 78.43달러로 소폭 내렸다. 이는 지난주 평균 가격보다 5달러 가까이 치솟은 것이다.
이에 따라 지난달 국제유가가 안정되면서 소폭 내렸던 국내 석유제품 가격도 조만간 다시 오를 것으로 보인다. 통상 국제유가 변동분은 2주간의 시차를 두고 국내 휘발유와 경유 등의 가격에 영향을 미친다.
비철금속 상승세도 만만치 않다. 지난달 말 기준으로 아연과 동은 t 당 1999달러, 7237.5달러로 한 달 만에 각각 13.6%, 12.2% 급등했다.
중국의 임금상승도 국내 물가에는 불안 요인이다. 현지 진출 기업의 인건비 상승으로 수입 물가를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최근 "특히 올해 들어 도요타 혼다와 같은 일본계 업체를 중심으로 중국 내 외국계 기업의 대규모 파업이 일어나면서 외국계 기업 노동자들의 임금이 최소 30% 이상 올랐다"고 보도했다.
●공공요금도 줄줄이 인상
국내 물가를 자극하는 것은 해외 요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정부가 전기와 도시가스 요금을 각각 3.5%, 4.9% 올린 데 이어 일부 지자체도 공공요금을 속속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경남 진주시와 함안시는 지난달 1일부터 정화조 청소료를 각각 32.7%, 31.6% 올렸고, 밀양시도 다음달 38% 가량 인상할 계획이다. 전남도는 지난달부터 시내·농어촌 버스의 운임을 8.6~12.7% 인상했고, 강원 원주시도 분뇨 수집 및 운반 수수료를 하반기에 평균 11~12% 올리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충북도와 울산시는 시내버스 요금을, 인천시는 하수도 요금을 각각 인상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안팎으로 터져 나오는 물가 불안 악재에 정부와 한국은행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공공요금의 경우 최대한 동결시키거나 소폭 인상에 그치도록 할 수 있지만 국제 곡물가격이나 유가 등 대외변수는 정부의 통제 범위 밖에 있기 때문이다.
기획재정부는 물가 안정을 위해 우선 도로통행료, 열차요금, 국제항공요금(인가제 노선), 광역상수도(도매), 우편요금 등을 올해 동결시키기로 했다. 윤종원 재정부 경제정책국장은 "지방공공요금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한 지자체에는 예산 배분과 평가 때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으로 인상을 최소화하도록 유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물가 안정을 책임진 한은은 공공요금 인상도 문제지만 생활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식품물가의 상승세를 더 경계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번 주 열리는 금융통화위원회에서 물가 안정을 위해 기준금리를 당장 올리지 않더라도 애그플레이션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드러내면서 금리가 재차 인상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낼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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