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 29일부터 주총 전자투표제 시행
시간-거리 제약에 참석않던 소액주주들 적극 투표땐
대주주 맘대로 의사결정하는 ‘섀도보 팅’ 막는 효과 기대
상장사 적극적 참여가 관건
다음 달 말부터 주주들이 주주총회에 직접 참석하지 않고도 인터넷을 통해 간편하게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전자투표제가 시행된다.
기업들은 앞으로 이사회 결의를 통해 주주총회의 전자투표제 도입을 결정할 수 있다. 전자투표 관리기관인 한국예탁결제원은 전자투표제의 시스템 구축이 마무리됨에 따라 6월 결산법인부터 시행할 계획이다.
국내에서도 기업의 주요 사항을 결정하는 주총에 ‘온라인 부재자투표’가 도입돼 소액주주의 권리가 보장되는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릴 것으로 전망된다.
○ 공인인증서로 인터넷 주총 참석 가능
대구에 사는 직장인 김모 씨(35)는 여태껏 자신이 투자한 기업의 주주총회에 참석한 적이 없다. 가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주총이 평일에 서울에서 열리기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지난해에는 휴가를 내고 참석하려고 했지만 주식을 보유한 기업 3곳이 같은 날 동시에 주총을 열어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김 씨는 “주총 안건에 대해 나름대로 의사를 밝히고 경영진 의견도 들어보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제약이 많아 불가능하다”고 토로했다.
5월 29일부터 전자투표제가 시행되면 김 씨처럼 그동안 의결권을 행사하지 못했던 소액주주들도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컴퓨터와 공인인증서만 있으면 전자투표시스템 서비스를 통해 온라인 투표로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
전자투표제는 주주가 주총장에 출석하지 않고도 인터넷에 접속해 특정 안건에 찬반을 클릭하는 방식으로 의결권을 행사하는 제도. 기업이 예탁결제원과 계약을 맺어 전자투표시스템에 주총의 의안과 의안별 자료, 의결권 제한 내용 등을 올리면 주주들은 주총이 열리기 하루 전까지 온라인으로 투표할 수 있다. 본인 확인을 위해 범용 또는 증권거래용 공인인증서로 로그인해야 한다. 기업은 이 결과를 통보받아 오프라인 주총 결과와 합산한 최종 결과를 시스템에 등록하고, 주주들은 온라인에서 결과를 조회할 수 있다.
전자투표제가 도입되면 의결권 행사에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사라져 실질적인 주주권리가 보장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주총이 서울(48%)과 경기(28%) 지역에서 주로 열려 지방 주주들은 참석하기 어려웠다. 또 전체 상장사의 62%가 같은 날 주총을 열어 여러 회사의 주식을 보유한 주주들도 일일이 의결권을 행사하기 힘들었다.
전문가들은 전자투표제 도입으로 대주주들이 감사 선임 같은 주요 사항을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데 활용해 온 ‘그림자투표(섀도보팅·Shadow Voting) 제도’가 축소되거나 폐지되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섀도보팅은 기업이 주총의 의결정족수가 모자란다고 판단하면 예탁결제원에 주주들이 맡긴 주권에 대한 의결권 대리행사를 요청하는 제도. 하지만 예탁결제원은 주총의 의결 방향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중립 의견으로 의결권을 행사할 뿐이다. 주주들의 주총 참석이 저조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91년 도입됐지만 적지 않은 기업에서 대주주 중심의 주총 운영수단으로 악용돼 왔다.
정완용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전자투표가 활성화되면 섀도보팅 같은 편법적인 방법 없이도 의결정족수를 채울 수 있다”며 “최근 일본에서는 휴대전화로 인터넷에 접속해 의결권을 행사하는 방식까지 도입됐고 스마트폰이 확산되는 추세를 볼 때 전자투표는 이제 미룰 수 없는 흐름”이라고 말했다.
○ 기업에 전자투표제 도입 의무 없어
전자투표는 기업의 의무사항이 아니어서 활성화될지에 대해선 회의적인 시각도 많다. 대기업들은 현재도 안건 통과에 별 어려움이 없는 상황에서 소액주주들의 목소리가 커질 수 있는 전자투표 도입을 꺼릴 수 있다. 또 중소기업들은 비용 부담을 걱정하는 상황이다. 한 중소기업 관계자는 “주총에도 잘 참석하지 않는 주주들이 과연 전자투표라고 해서 얼마나 참여할지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교수는 “서면 자료 발송이나 오프라인 주총 때 제공하는 기념품 같은 비용의 절감 효과가 더 크다”며 “다만 소액 주주들이 의결권 행사에 적극적으로 나서려는 의식 전환이 우선돼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미국에서는 전자투표 도입 후 2008년 한 해에만 우편비용이 4억9000만 달러(약 5400억 원) 줄었다는 조사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 ‘사이버 주총꾼’ 인터넷 여론몰이 부작용 우려도 ▼
전자투표로 일단 의결권을 행사하고 나면 마음이 바뀌어도 번복할 수 없다는 문제도 있다. 김순석 전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전자투표를 하고 난 뒤에는 무조건 의견을 철회할 수 없도록 돼 있어 생각이 바뀌는 등의 이유로 의견을 변경하려는 주주의 권리를 지나치게 제한할 소지가 있다”며 “주총 전 전자투표 결과를 기업이 미리 알고 주총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점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소액주주들이 온라인으로 쉽게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면서 주총 전에 인터넷에서 여론몰이를 해 기업에 영향을 미치려는 ‘사이버 주총꾼’이 활개를 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미국 영국 일본 등 선진국 기업들은 2000년대 초부터 주주중시 경영, 기업경영의 정보기술(IT)화 등을 위해 전자투표제를 도입했다. 2000년 도입한 미국에서는 상장사 가운데 45%가 전자투표제를 시행하고 있으며 영국(21%)과 일본(18%)에서도 점차 활용도가 높아지고 있다. 특히 2001년 말 도입한 일본은 전자투표를 채택한 기업 가운데 48%가 전자투표를 통해 20% 이상의 의결권 주식수를 확보하고 있다. 소니 혼다 도요타 닌텐도 등 주요 기업들은 사이버공간에서 주주총회를 여는 전자주주총회까지 추진하고 있다.
신기술 도입이 가져올 ‘양날의 칼’ 효과에도 불구하고 전자투표는 주주권 보호를 위한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는 지적이 많다. 정재규 한국기업지배구조센터 평가조정실장은 “일반적으로 주주들이 의결권 행사에 큰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최근에는 배당이나 사외이사 등의 의사결정에 참여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전자투표를 도입하지 않는다면 이유와 배경 등을 주주들에게 공시하도록 하고 투자자들 사이에서 전자투표가 바람직한 주주권 보호제도로 널리 인식된다면 기업들도 마냥 외면하긴 어려울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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