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금융, 그라민은행에서 배워라]<상>대출회수율 98%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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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4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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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보보다 자활의지” 직원들 눈과 발로 대출심사
신용등급 서류 대신
직접 대출자 집 방문
가정형편 꼼꼼 체크
이웃 평판도 큰 영향

지난달 23일 방글라데시 그람바알리 마을의 그라민센터에서 대출자들이 빌린 돈을 갚고 있다. 그라민은행의 직원들은 매일 2곳 이상의 마을을 직접 방문해 대출금을 받고 신규대출 상담을 한다. 가지푸르=문병기 기자
지난달 23일 방글라데시 그람바알리 마을의 그라민센터에서 대출자들이 빌린 돈을 갚고 있다. 그라민은행의 직원들은 매일 2곳 이상의 마을을 직접 방문해 대출금을 받고 신규대출 상담을 한다. 가지푸르=문병기 기자
《지난달 23일 방글라데시의 수도 다카에서 북쪽으로 60km가량 떨어진 그람바알리 마을. 어지럽게 널린 소와 닭의 배설물로 악취가 코를 찌르는 이곳은 방글라데시의 전형적인 시골마을이다. 그라민은행 직원 아스마 자파르 씨(23·여)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을 새도 없이 종종걸음으로 마을 입구에 세워진 가건물에 들어섰다. 지붕과 벽이 양철판으로 된 13m2(4평) 남짓한 건물은 이 마을의 그라민센터. 섭씨 35도가 넘는 더위에도 선풍기 한 대 설치되지 않은 이곳엔 10대 후반의 새색시부터 60대 할머니까지 마을 여성 50명이 모여 있었다. 그라민은행에 대출금을 갚기 위해서다.》
자파르 씨가 받아야 하는 돈은 모두 6만 다카(약 120만 원). 1억6000만 명의 인구 가운데 1억 명 이상이 하루 1달러 미만의 생계비로 살고 있는 방글라데시에선 어마어마한 돈이다. 이 마을 대출자 모임을 이끄는 살레하 씨(44·여)가 먼저 1800다카를 상환했다. 그는 지난해 타일공장을 짓느라 30만 다카를 빌렸다. 젖소를 8마리나 기르고 있는 모멜라 씨(41·여)도 2000다카를 갚았다.

30분간의 상환이 끝나자 자파르 씨 앞에는 6만 다카가 모두 모였다. 돈을 구하지 못해 쩔쩔매는 대출자가 한 명쯤은 있을 법도 했지만 기우에 불과했다. 살레하 씨는 “그라민은행의 회원(대출자)이 되기 전엔 주민 대부분이 끼니를 거른 경험이 있을 정도로 가난했다”며 “하지만 지금은 50명의 회원 가운데 20명 이상이 월 5만 다카(100만 원) 이상을 버는 부촌이 됐다”고 말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 중 한 곳인 방글라데시. 이 나라에서 특별히 농촌 빈민을 상대로 돈을 빌려주는 그라민은행은 세계 마이크로크레디트(소액 무담보 신용대출)의 성공신화로 꼽힌다. 1976년 10명의 여성에게 약 10만 원씩을 빌려주는 것으로 시작된 그라민은행은 2008년 말 현재 767만 명에게 약 7조6000억 원을 빌려준 방글라데시 최대 금융기관으로 성장했다.

한국판 마이크로크레디트를 표방하며 지난해 12월 첫선을 보인 미소금융은 15일로 출범 4개월을 맞았다. 2조 원을 모아 대대적으로 시작했지만 지금까지 대출을 받은 이는 743명에 불과하다. 10년간 25만 가구를 지원하겠다던 목표의 10분의 1도 채우기 어려운 실정이다.

도시의 저신용층을 대상으로 한 미소금융과 농촌 빈민층에게 대출을 해준 그라민은행 사이엔 분명한 차이가 있다. 하지만 ‘전문성을 가진 직원들이 직접 대출자를 찾아다니며 돈을 빌려주고 장기간 철저히 관리해 빈곤에서 탈출시킨다’는 그라민은행의 기본 원칙은 한국의 미소금융에 많은 점을 시사한다.

○ 그라민은행, 돈 떼이지 않는 비결

“아버님 건강은 어떠세요? 약값은 가족 중에 누가 내나요?”

그람바알리 마을 그라민센터에서 업무를 마친 자파르 씨는 신규대출을 신청한 모시미 씨(26·여)를 찾았다. 모시미 씨가 대출을 받아도 될지 심사하기 위해서다. 모시미 씨는 얼마 전 작은 양계장을 차릴 계획으로 2만 다카의 대출을 신청했다.

특이한 점은 그라민은행 직원이 직접 대출자 집을 찾아가 대출신청서를 작성한다는 것. ‘현장을 찾아가는 대출절차’는 자활의지가 강한 대출자를 골라내는 데 효과적이다. 그라민은행의 대출신청서는 일반 은행과 크게 다르다. 신용등급을 묻는 항목이 없다. 그 대신 모시미 씨의 가정형편을 묻는 질문이 4쪽에 걸쳐 꼼꼼하게 적혀 있다. 가족 수와 한 달 수입 등 기본적인 사항부터 가족의 학력과 건강상태는 어떤지, 집에 가구나 조리기구는 어떤 것이 있는지, 침실의 상태는 어떤지 등 모시미 씨 가족의 경제력을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세세히 적는다. 신용등급과 부채, 자산만으로는 알 수 없는 구체적인 정보를 모두 파악해 대출심사에 활용하는 것이다.

미소금융, 대출조건 까다로워 실적 부진
조건은 완화하고 현장조사 비중 높여야

자파르 씨는 이웃들을 찾아다니며 모시미 씨에 대한 평판을 확인했다. 그의 생활태도와 자활의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이웃을 통한 정보 수집에만 통상 3, 4일이 걸릴 정도로 신규대출자에 대한 현장 조사는 철저하게 이뤄진다. 대출에 대한 최종 결정은 300∼500명의 대출자를 관리하는 지점장이 내리지만 이렇게 수집된 정보는 대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처럼 은행원들이 매일 발품을 팔아 주민들의 세세한 가정형편을 꿰뚫고 있으니 대출신청자는 속임수로 대출을 받기도 어렵고 대출금을 떼먹기도 힘들다. 담보로 잡힐 땅도, 일정한 수입도 없는 빈민층만을 골라 대출을 해줘도 그라민은행의 대출 회수율이 98%가 넘는 이유다. 저신용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국내 저축은행의 대출 회수율이 85% 안팎인 점을 감안하면 굉장히 높은 수치다.

○ 미소금융의 딜레마

서울 종로 인근에서 떡볶이 노점상을 하던 방모 씨(51)는 최근 가게를 내려고 서울의 한 미소금융 지점을 찾았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탈락 이유는 1년 전 휴대전화 사용료를 제때 내지 못해 금융채무불이행자(옛 신용불량자)로 지정됐던 전력 때문. 방 씨는 “오래된 연체 기록 때문에 대출이 안 된다니 누굴 위한 대출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미소금융의 가장 큰 문제는 까다로운 대출조건이다. 대출을 받으려면 신용등급이 7등급 이하이면서 금융채무불이행자여선 안 되고 부채가 자산의 절반을 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미소금융 대출을 받길 원하는 서민층 가운데 이런 조건을 만족하는 이는 거의 없다. 미소금융 대출을 받은 이가 전체 대출상담자의 3%에 불과한 이유다.

미소금융이 대출조건을 까다롭게 한 것은 대출회수율을 높이기 위해서다. 이자율이 연 20%인 그라민은행과 달리 미소금융의 금리는 연 2.0∼4.5%로 국내 시중은행의 대출금리보다 훨씬 낮다. 공짜나 다름없는 금리인 만큼 대출회수율이 낮아지면 2조 원의 재원이 금세 바닥난다. 미소금융 관계자는 “대출조건을 그대로 두자니 실적이 부진하고, 조건을 완화하자니 돈을 떼일까 걱정되는 진퇴양난의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런 딜레마를 극복하려면 대출조건은 완화하되 직원들이 직접 신청자의 가정이나 이웃, 사업현장을 방문하는 현장 조사 비중을 높여야 한다. 이를 통해 신용등급이 낮거나 부채가 많더라도 사업성공 의지가 강한 이들을 골라낼 수 있어야 한다. 미소금융은 서류심사를 통과한 신청자에 한해 현장조사를 한다. 하지만 하루의 대부분을 현장에서 보내는 그라민은행과 달리 미소금융의 현장 심사는 대출 직전에 한두 차례 이뤄지는 것이 전부다.

자파르 씨는 ”그라민은행 직원에겐 담당 마을의 주민들을 얼마나 많이 파악하고 있느냐가 얼마나 일을 잘하느냐와 같은 의미”라며 “좋은 신청자를 가려내는 것도, 대출 연체율이 낮은 것도 모두 현장 중심 영업 덕분”이라고 말했다.

다카·가지푸르=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



▼그라민은행 수습사원 1년간 4차례 엄격한 시험
미소금융 간단한 소양 교육후 바로 대출심사▼


올해 1월 그라민은행에 입사한 조엘 호세인 씨(23)는 요즘 퇴근 후 책에 파묻혀 지낸다. 매일 10km 이상을 걸어 두 곳의 마을을 다니며 현장실습을 하는 강행군 속에서도 그가 책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3주 앞으로 다가온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대출심사와 대출자 관리 방법 등을 평가하는 이 시험에서 탈락하면 입사가 취소될 수도 있다.

그라민은행의 신입사원은 1년간 수습기간을 거쳐 정식사원으로 채용된다. 수습기간은 교육과 시험의 반복. 수습사원들은 네 번의 교육과 세 번의 현장실습을 거치는 동안 네 번의 시험을 치른다. 대출심사 방법, 대출관리, 대출자 상담 및 교육 등에 대한 구술과 지필시험으로 이뤄진 이 시험에서 두 번 이상 탈락하면 입사가 취소된다.

이처럼 까다로운 입사 과정을 거치는 이유는 대출 심사에 높은 전문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산이나 신용등급처럼 눈에 드러난 수치를 평가하는 일반 은행과 달리 대출신청자의 자활 의지나 사업성공 가능성과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항목 평가가 훨씬 어렵다. 대출자들이 가난에서 벗어나도록 꾸준히 상담과 조언을 해줘야 하는 것도 단순히 대출금을 잘 회수해 수익을 올리면 그만인 일반 은행과 다른 점이다.

30여 년간 마이크로크레디트에 대한 노하우를 쌓아온 그라민은행은 직원들이 빨리 습득할 수 있도록 입사 때부터 까다로운 교육과정을 거친다. 모든 직원은 3개월에 한 번씩 다카에 설립된 그라민교육센터에서 교육을 받는다.

반면 미소금융은 입사 직후 받는 기본 소양교육이 교육프로그램의 전부다. 경험이 전혀 없는 직원들이 간단한 교육만 받고 대출심사와 상담에 투입된다. 지방 미소금융 지점의 한 자원봉사자는 “입사 직후 받는 소양교육만으로는 깊이 있는 대출심사나 상담이 어려운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다카·가 지푸르=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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