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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12월 31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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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이 30일 통화옵션상품 키코(KIKO) 계약에 대한 은행의 책임을 일부 인정함에 따라 이 금융상품으로 피해를 본 기업들의 가처분 신청이 줄을 이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결정으로 기업들은 키코로 인한 피해를 줄일 수 있게 됐지만 은행권은 기업들이 물던 손실을 떠안을 가능성 때문에 비상이 걸렸다.
○ 키코 불완전 판매 첫 인정
법원의 이번 결정으로 키코 가입 기업들은 소송 이전의 손실은 그대로 떠안지만 남은 계약 기간의 손실은 부담하지 않아도 돼 키코로 인한 유동성 위기를 어느 정도 넘길 수 있게 됐다. 비록 피해 기업들이 지난달 은행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긴 했지만, 최종 판결이 나기 전까지는 이전에 맺은 계약의 효력이 유지돼 매달 손실을 봐야 했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특히 “은행들의 키코 판매 관행에 상당부분 문제가 있었다”는 주장을 법원이 인정했다는 것에 고무된 상태다. 문제가 된 관행은 ‘설명의무 및 적합성 원칙 위반’이라는 게 법원의 판단이다.
법원은 결정문에서 “은행은 계약이 내포하는 위험을 충분히 설명했어야 하는데 계약 체결을 권유하는 과정에서 이를 단지 일반적, 추상적으로 고지했다”며 “기업들이 재무구조나 위험관리능력 등에 비해 과도한 위험에 노출되지는 않는지를 미리 점검해 기업에 적합한 계약인지를 고려했어야 한다”고 밝혔다.
법원은 또 “계약 당시와 달리 원-달러 환율이 급등하면서 기업들이 예상할 수 있었던 손실의 범위를 훨씬 넘어섰고, 이에 따라 계약으로 인한 기업과 은행의 거래 손익 사이에 현저한 불균형이 생겼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이미 계약을 맺었다고 해도 환율 변동성 등 계약의 기초가 됐던 객관적 상황이 급격히 바뀌었다면 기업의 계약 해지권이 인정된다는 뜻이다.
중소기업중앙회 강남훈 본부장은 “이미 맺은 계약으로 매달 은행에 달러를 싼값으로 팔아야 했던 기업들이 더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는 뜻”이라며 “내년 초 피해기업들과 논의한 뒤 추가로 가처분 신청을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 은행들, 손실 대신 떠안을 수도
이날 결정으로 은행들은 비상이 걸렸다.
은행들은 통상 기업과 키코 계약을 하면서 손실 가능성을 헤지(위험회피)하기 위해 외환시장에서 반대거래를 맺는데, 기업들이 남은 계약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거래 상대방에게 대지급을 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기업의 손실 부담이 고스란히 은행에 간다는 뜻이다.
이번 결정의 당사자인 SC제일은행은 “아직 법원에서 정식으로 통보받지 못했으며 통보를 받으면 내부적으로 검토해서 대응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다른 은행 관계자는 “이번 결정은 SC제일은행이 맺은 특정 계약에만 해당되는 것”이라며 “다른 은행 사례를 갖고 의견을 밝히기 어렵다”고 말을 아꼈다.
그러나 은행들은 대체로 “시장 환율 등 계약 기준이 나중에 바뀐다고 해서 그 계약을 무효로 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냐”며 매우 불만스럽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10월 말 현재(당시 환율 기준) 키코에 가입한 487개 기업의 손실은 실현손실과 평가손실을 합쳐 3조2000억 원에 이른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