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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12월 20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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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코가 석자…” 대출파이프 잠가
기업 부도위험 커진 美-加도 한국과 ‘판박이’
“은행 자본 확충-기업 옥석 가리기 속도내야”
기업은 ‘돈 가뭄’에 시달리고 있지만 은행권에는 여윳돈이 넘치고 있다. 한국은행이 돈을 아무리 풀어도 돈이 은행권 밖으로 흘러넘치지 않고 한국은행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국내 금융시장이 돈이 부족한 ‘빈혈’ 상태가 아니라 돈이 은행에서 실물경제로 제대로 흐르지 않는 ‘돈맥경화’ 치료를 위한 강도 높은 대책이 시급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 은행권의 막힌 파이프가 ‘역류 원인’
10월 금융기관의 대출 평균 금리는 7.79%. 은행이 가계나 기업에 돈을 빌려주면 연 8%에 육박하는 수익을 거둘 수 있는데도 3%의 금리만 쳐주는 한은에 단기로 자꾸 돈을 맡기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한은은 단기 유동성을 풍부하게 공급하면서 은행이 이 돈을 기업대출 등 장기로 돌릴 것으로 기대하지만 실상은 다른 것. 한 시중은행 자금담당 부행장은 “단기자금은 넘치지만 기업대출에 운용할 장기자금 여력은 크지 않다”고 말했다.
연말 결산을 앞둔 은행의 내부 사정에도 원인이 있다. 은행의 자산 건전성을 보여주는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은 9월 말 10%대로 떨어졌다. 금융 감독당국은 이 비율을 12%대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압박하고 있다. 기업들의 부도 위험이 커진 상황에서 은행들이 위험가중 자산인 기업 대출을 늘리기는 쉽지 않다.
한 시중은행 부행장은 “대기업들이 감산, 조업 중단을 시작하면서 중소기업의 시설과 운전자금 수요는 줄고, 경기가 나아질 때까지 버티기 위한 ‘생존자금’ 수요가 늘었다”며 “일시적으로 유동성 부족을 겪는 회생 가능한 기업인지 가려내기가 쉽지 않아 기업 생존을 위한 자금을 선뜻 내주기 어렵다”고 털어놨다.
금융위기의 진원인 미국에서도 중앙은행으로 자금이 역류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기업에 대출해 주지 않는 은행들에 대한 캐나다 정부의 불만도 한국과 판박이다.
○ 은행 자본 확충과 신용 보강이 급선무
‘돈맥경화’를 해소하려면 먼저 은행의 자기자본 확충을 통한 자금중개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정부가 20조 원 규모의 ‘은행권 자본확충 펀드’를 추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은행이 BIS 비율 하락 걱정을 하지 않고 돈을 빌려줄 수 있도록 11조7000억 원 규모로 늘리기로 한 신용보증기금과 기술보증기금의 보증 여력을 더 늘려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동걸 금융연구원장은 “내년 실물경제 침체로 기업 도산이 늘어날 수 있다”며 “신·기보 기금을 10조 원 늘려 신용보증 여력을 100조 원 규모로 확대하되 은행의 ‘도덕적 해이’를 막기 위해 보증비율은 90∼95%로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업신용 보강에 따르는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은행의 자금중개 기능을 되살리려면 ‘무임승차’하는 부실기업을 솎아내는 ‘옥석 가리기’에 속도를 낼 필요도 있다.
중앙대 신인석(경제학) 교수는 “상황이 어려울 땐 금리인하 정책으로 시중에 돈을 풀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신용위험을 낮춰줘야 한다”며 “단, 정부가 기업이나 가계 신용보증을 확대할 땐 구조조정을 같이 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권순우 삼성경제연구소 거시경제실장은 “은행의 BIS 비율을 높이고 기업의 옥석을 가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면서 통화량을 적극 공급하면 돈이 돌 수 있을 것”이라며 “부실기업 정리는 기업 정보를 가장 잘 아는 금융권이 전면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더 나아가 미국이나 일본처럼 중앙은행이 기업어음(CP) 매입 등을 통해 직접 ‘파이프’를 박고 기업에 자금을 공급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박용 기자 parky@donga.com
정재윤 기자 jaeyuna@donga.com
신수정 기자 crysta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