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스와 118년 공생… 유럽 최대 R&D도시 탈바꿈
《‘빛의 도시’ 에인트호번. 한국에서는 박지성, 이영표 선수와 거스 히딩크 감독이 활약하던 명문 축구클럽 ‘PSV 에인트호번’의 연고지로도 잘 알려진 도시다. 네덜란드 수도 암스테르담에서 동남쪽으로 130여 km 떨어져 있는 에인트호번은 인구 5000명도 채 안 되는 한적한 마을이었지만 1891년 필립스가 둥지를 틀면서 본격적으로 성장했다. 조명산업의 대명사인 필립스 때문에 도시의 애칭도 자연스럽게 ‘빛’이 됐다.》
필립스 R&D센터 짓고 나노 - 자동화 - 의료 등 집중 육성
“정책 결정 최우선 기준은 필립스”… 市도 2억유로 지원
50개국 75개기업 유치… 네덜란드 GDP의 14% 벌어들여
네덜란드 5대 산업도시로 성장한 에인트호번은 21세기 들어서는 자동화기술, 나노테크놀로지, 의료 등 첨단기술 연구개발(R&D) 중심지로 탈바꿈하고 있다. 118년간 공생(共生)해온 에인트호번과 필립스의 흥미로운 도전은 유럽뿐 아니라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 오늘의 에인트호번을 만든 필립스
에인트호번 시청의 크리스 드 프린스 외국인투자 및 국제 업무 매니저는 “초기 에인트호번 정착민들은 필립스로부터 땅을 사고 필립스가 지은 집을 구했다”며 “지금도 에인트호번 사람들은 필립스의 전구를 쓰고 필립스 면도기, 필립스 TV로 생활한다”고 말했다.
에인트호번과 필립스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됐다. PSV 에인트호번도 1913년 필립스의 공장 근로자들이 결성한 사내(社內) 클럽이 원조. 이미 100년 가까이 시민들과 호흡해온 이 클럽의 홈구장 이름은 ‘필립스 스타디움’이다. 필립스 뮤지컬 공연장, 필립스 교향악단, 필립스 마라톤 등 지역사회 곳곳에서 필립스와의 연결고리는 쉽게 발견된다.
필립스와 에인트호번을 얘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첨단기술 집적단지인 ‘하이테크캠퍼스 에인트호번(HTCE)’이다.
이곳엔 현재 50개 나라의 75개 기업이 입주해 있다. 미국 IBM, 일본 NEC전자 등 글로벌 기업 8개와 15개의 R&D그룹, 5개 국책연구원, 30여개 신생 벤처기업 등이 HTCE 가족들이다. HTCE 측은 입주 기업을 100개까지 늘려 현재 6600여 명(필립스 3000여 명)인 연구원을 1만 명 이상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 ‘디지털 생태계’의 현장, HTCE
지난달 중순 에인트호번 시내에서 차로 10분 남짓 달려 찾은 HTCE에서는 대학 캠퍼스에 온 듯한 자유분방함과 치열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낮 12시가 넘은 시간이었는데도 콘퍼런스 센터 대강의실은 세미나가 한창이었다. 3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강의실이 9개나 되는 이 센터의 세미나 일정은 연말까지 꽉 차 있었다. 강의실 밖에서도 한 손에는 와인이나 음료수, 다른 한 손에는 펜을 쥔 채 열띤 토론을 벌이는 연구원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HTCE는 1963년 필립스가 넓은 밀밭에 R&D센터로 사용할 건물 두 동(棟)을 지으면서 태동했다. 자유로운 정보 공유를 전제로 하는 ‘디지털 생태계’의 중요성을 인식한 필립스는 2003년부터 다른 기업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모든 정책 결정의 최우선에 필립스를 둔다’는 에인트호번 시도 가만있지 않았다. 103만 m² 크기의 HTCE 조성에 2억 유로(약 3380억 원)를 투자했다. 필립스 소유의 땅이지만 HTCE 운영과 외부 기업 유치 등 행정·지원 업무는 모두 지역개발공사가 맡고 있다. 기업은 기업 활동에만 전념하도록 한 에인트호번의 배려다.
HTCE 홍보담당자인 벨트 얀 볼트만 씨는 “이곳에 입주한 회사의 연구원들은 언제든지, 어느 누구와도 정보를 교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에인트호번과 필립스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2005년에는 신생 연구기관이나 기업을 지원하는 ‘TeLRE’라는 펀드를 만들었다. 올해까지 4년간 300만 유로(약 51억 원) 규모로 시범 운영된 이 펀드는 내년부터 크게 확대될 예정이다.
에인트호번에 해외 기업과 고급 인력이 모여드는 배경에는 뛰어난 거주 요건도 한몫한다. 35개국 출신 어린이(4∼12세) 500여 명이 공부하고 있는 RIS(1965년 설립)와 청소년(11∼19세) 260여 명을 교육하는 ISSE(1974년 설립)는 유럽에서도 가장 훌륭한 국제학교로 꼽힌다.
○ 지식기반형 기업도시의 모델
에인트호번 시와 21개 위성도시를 포함한 ‘에인트호번 지역(region)’의 인구는 지난해 1월 기준 72만8000여 명으로 네덜란드 전체의 4.5% 정도이지만 이곳의 지역내총생산(GRDP)은 네덜란드 국내총생산(GDP)의 14.5%나 된다.
필립스뿐 아니라 ASML(반도체 웨이퍼), NXP(반도체), FEI(전자현미경) 등 필립스로부터 독립한 자(子)회사들의 성장과 함께 인구도 꾸준히 늘고 있다. 1995년 이후 지난해까지 에인트호번 지역 인구 증가율은 7.63%. 같은 기간 네덜란드 평균은 6.05%다.
에인트호번 지역에서 이뤄지는 연간 R&D 투자액은 네덜란드 전체의 43%에 이른다. 필립스만 해도 1998∼2007년 10년간 HTCE에 6억 유로(약 1조140억 원)를 투자했다.
이에 따라 에인트호번 지역은 전체 35만5000여 개의 일자리 중 7만여 개가 첨단기술 산업과 관련된 것일 정도로 유럽은 물론 세계적으로 대표적인 ‘지식기반형 기업도시’의 성공사례로 꼽힌다.
에인트호번=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 “에인트호번은 브레인포트” ▼
지역정부-기업-교육기관 협력 첨단기술 도시로
네덜란드 정부도 2013년까지 2조9000억원 투입
네덜란드는 2004년 에인트호번 지역을 ‘브레인포트(Brain Port)’로 지정해 2013년까지 이곳을 유럽 최대 첨단기술 중심으로 키우기 위한 야심 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2005년부터 2013년까지 9년간 최소 17억5000만 유로(약 2조9575억 원)가 투입되는 대규모 프로젝트다.
브레인포트 계획의 원동력은 지역정부와 필립스를 포함한 기업들, 교육기관인 에인트호번 공대(TU/e) 간의 밀접한 협력관계에서 나온다. 이들의 관계는 DNA의 이중나선 구조인 ‘더블 헬릭스(Double Helix)’를 인용해 ‘트리플 헬릭스(Triple Helix)’로 불린다.
시 정부는 트리플 헬릭스를 이룬 3자 간 교류를 적극 돕기 위해 별도의 사무실을 마련하고 15명의 전담 인력까지 배치했다.
특히 1956년 설립된 TU/e의 역할에 거는 기대가 크다. 매년 7000명 이상의 졸업생을 배출하는 TU/e의 박사후연구원 수는 2002년 520여 명에서 2006년 640여 명으로 늘어났다.
‘하이테크캠퍼스 에인트호번(HTCE)’에 입주한 기업들 상당수는 TU/e와 산학(産學) 협력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고, 50명 이상의 기업인이 이곳에서 단기 강의를 맡고 있기도 하다.
브레인포트의 핵심 요소는 △사람 △기술 △비즈니스 △환경 등 4가지다. 우수한 교육환경에서 양성된 인재들이 첨단 지식산업에 종사하고, 여기서 개발된 혁신기술은 곧바로 사업화해 이윤과 함께 또 다른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선(善)순환 구조다.
에인트호번 시청의 크리스 드 프린스 외국인투자 및 국제업무 매니저는 “브레인포트 계획의 성공 여부는 각각의 요소를 얼마나 균형 있게 발전시킬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며 “네덜란드의 미래 또한 여기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에인트호번=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