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의 땅, 한국기업에 빗장 열다

  • 입력 2007년 1월 27일 03시 11분


코멘트
하노이 시내의 현대자동차 광고판 한국 기업들은 베트남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포스트 브릭스(BRICs) 국가에서도 뜨거운 경쟁을 벌이고 있다. 베트남 하노이 시내에서 볼 수 있는 현대자동차의 대형 광고판. 동아일보 자료 사진
하노이 시내의 현대자동차 광고판 한국 기업들은 베트남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포스트 브릭스(BRICs) 국가에서도 뜨거운 경쟁을 벌이고 있다. 베트남 하노이 시내에서 볼 수 있는 현대자동차의 대형 광고판. 동아일보 자료 사진
‘꼭 해내야 한다.’

2005년 12월 24일. 금호건설의 장복상 상무는 인천국제공항에서 베트남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그에게는 회사의 명운(命運)이 걸린 중책이 떨어졌다. 마음이 무거웠다.

‘금호아시아나플라자 프로젝트.’ 서울로 치면 세종로 사거리쯤에 해당하는 베트남 호찌민 한복판에 호텔과 아파트, 고급 주상복합건물 등을 짓는 대형 사업이다. 이 사업은 당초 1996년에 계획한 것이었지만 한국이 다음 해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중단됐다. 장 상무의 임무는 베트남 정부에 반납한 사업권을 다시 따오는 일이었다. 단단히 각오하고 베트남 땅을 밟았지만 그곳은 이미 글로벌 기업들의 전쟁터였다.

“옛날보다 땅값도 많이 오르고 경제여건도 몰라보게 달라져 있더군요. 홍콩, 일본의 경쟁업체들이 이곳에 투자하려고 군침을 잔뜩 흘리고 있었어요.”

베트남은 대표적인 ‘포스트 브릭스(BRICs)’ 국가 중 하나다. 베트남을 비롯해 남아프리카공화국, 터키, 태국 등은 이미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기회의 땅’이 되고 있다. 이곳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의 활약도 뜨겁다.

○ 글로벌 각축전 이미 시작됐다

장 상무는 사업권을 되받아 오기 위해 베트남 정부와 수십 차례 협상을 거듭했다.

경쟁업체들은 “한국기업은 베트남 발전에 기여를 못 한다”, “금호는 곧 망할 회사”라는 등의 악성 루머를 퍼뜨리며 발목을 잡았다.

그는 회사의 언론보도 내용, 실적 보고서를 일일이 베트남어로 번역해 정부 고위층은 물론 실무를 맡는 공무원까지 찾아다녔다. 베트남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수해의연금, 농업발전기금을 내는 등 갖가지 사회공헌 활동도 했다. 반년 만인 지난해 6월 금호건설은 드디어 사업권을 단독으로 따냈다. 장 상무는 요즘 베트남 본부장을 맡아 현지 공사를 지휘하고 있다.

남아공의 행정수도 프리토리아에는 LG전자 제품만 파는 ‘LG브랜드숍’이 있다. 현지인 에어컨 판매업자가 “LG의 브랜드 인지도가 높다”며 가게를 열겠다고 자청한 것이다. LG전자 남아공법인 오윤택 차장은 “가게의 인기가 워낙 좋아 올해도 LG판매점을 더 열겠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말했다.

2010년 월드컵 개최국인 남아공은 올 상반기(1∼6월) 중 교통 통신 등 인프라 시설 입찰을 마무리할 계획이어서 한국 기업들의 투자수요도 최근 급증했다. KOTRA 요하네스버그 무역관 고일훈 과장은 “그냥 ‘밀림이나 있겠지’ 생각하다 직접 현장에 와 보고는 생각을 바꾸는 기업인이 많다”고 말했다.

포스트 브릭스의 가능성을 본 한국 기업들은 때로는 과감한 투자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현대자동차는 올 3월에 승용차 ‘라비타’의 생산기지를 아예 터키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현대차 터키법인 김용성 부장은 “비록 정치 불안 요소는 있지만 유럽연합(EU) 가입을 앞둔 터키는 유럽 판로(販路)를 열기 위한 최적의 교두보”라고 말했다.

○ 한국과 특별한 인연

‘한국 최대의 글로벌 기업이 구호의 손길을 보내왔다.’

지난해 6월 삼성전자 인도네시아법인이 현지 지진 피해지역에 재해복구 봉사단을 보내자 현지 언론들은 큰 반향을 보였다.

삼성전자 안홍진 상무는 “대가를 바라지 않는 인도적 차원의 지원이었지만 향후 우리 제품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를 심어주는 데 큰 효과를 봤다”고 말했다.

한국국은 유난히 포스트 브릭스 국가들과 ‘특별한 인연’이 많다. 그리고 이 같은 끈끈한 관계는 한국기업의 든든한 우군(友軍)이 되고 있다.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기업인들은 “베트남에서 우리 제품이 잘 팔리는 것은 모두 대우그룹 덕분”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비록 지금은 ‘경제사범’으로 실형이 확정된 뒤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신세지만 ‘세계 경영’의 선구자였던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이 수시로 베트남을 오가며 신뢰를 쌓아 놓았기 때문이다.

터키는 6·25전쟁 참전부터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응원까지 오랫동안 ‘형제국가’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태국 등 동남아도 한류(韓流) 열풍 덕에 한국 제품의 인기가 높다. ‘포스트 베트남’으로 주목받고 있는 캄보디아에도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배우려는 바람이 거세다.

○ 리스크도 크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섬유업체를 운영하는 정모(35) 씨는 최근 공장 앞을 지나는 도로와 공장을 잇는 샛길을 내기 위해 공무원을 찾아갔다.

정 씨는 “처음에는 허가를 내줄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하더니 ‘봉투’를 들고 다시 한번 찾아가니까 바로 허가서를 내줬다”며 “아직도 뒷돈이 오가야 사업이 진행되는 곳”이라고 말했다.

포스트 브릭스 국가들은 가능성만큼이나 위험도 크다.

최근 나이지리아에서의 대우건설 직원 납치, 태국의 군부 쿠데타 등도 이들 국가의 투자 환경이 한국을 비롯한 외국기업에 그다지 우호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 준다. 대부분의 포스트 브릭스 국가는 경제성장을 위해 외국인 투자를 반기고 있지만 일부 국가는 개방의 문을 오히려 좁히기도 한다. 자국의 토착산업과 자원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카자흐스탄에서 석유개발 사업을 총괄하고 있는 LG상사의 김수영 부장은 “최근 중국이 이곳 유전을 휩쓸면서 카자흐스탄 정부도 외국인에 대한 배타적인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고 말했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웰컴!

행정-세제 혜택주며 외국기업 모시기

모델하우스 개관식에 대통령까지 참석

005년 10월, 카자흐스탄의 수도인 아스타나 대통령 궁 앞.

국내 건설회사인 동일하이빌이 짓는 3000여 채 규모의 아파트 모델하우스 개관식에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나타났다.

당초 5분간 모델하우스를 둘러볼 계획이던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무려 40분 넘게 구석구석을 뜯어봐 경호팀을 당혹하게 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고재일 동일하이빌 회장에게 “인허가 과정에서 문제는 없었느냐”며 사업과정 전반에 관심을 표명하기도 했다.

포스트 브릭스 국가들은 이처럼 ‘늦은 출발’을 만회하기 위해 전방위적인 외국투자 유치 전략을 펴고 있다. 행정절차 간소화나 세제(稅制) 및 금융지원은 물론 필요하면 공무원들이 직접 기업을 방문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해외자본의 직접투자(FDI) 유치를 늘리기 위해 최근 은행, 방송을 제외한 전 산업에 대한 외국인 지분을 100% 인정하기로 했다.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빗장을 확 풀면서 해외자본을 끌어들이겠다는 것이다.

요하네스버그 국제공항 일대에 산업개발지역을 조성해 이곳에 입주한 외국기업은 기계설비 수입 때 관세를 면제해 주고 있다. 중동의 허브(Hub)로 도약하는 두바이의 경제자유구역의 면세체계와 유사하다.

태국은 지난해 9월 관광특구 내에 5억 밧(약 130억 원) 이상 투자하면 관련 기계를 수입할 때 관세를 면제 하고, 8년간 법인세 면제 혜택도 주는 내용의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했다.

이란도 지난해 말 정부의 경제 참여비율을 현재 65%에서 20%로 줄이고 민영화 추진을 통한 적극적인 외국인 투자 유치를 선언했다.

김격수 동일하이빌 이사는 “포스트 브릭스 국가 공무원의 대부분은 외국 기업의 사정에 맞춰 자국의 규정을 고치겠다는 각오로 일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승헌 기자 ddr@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