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기획]기술 평준화시대, 가격 차별화로 승부

  • 입력 2006년 3월 27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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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품 - 인사 - 서비스, 해외로 아웃소싱

유럽 3위의 대형 항공사 영국항공(BA)의 연간 구매 예산은 65억 달러(약 6조5000억 원). 370대의 비행기로 세계 84개국을 오가는 이 회사는 협력업체만 3만여 곳에 이른다.

BA는 구매 비용을 어떻게 줄일까 고민하다 새로운 ‘저비용 국가 소싱(LCCS·Low Cost Country Sourcing)’을 도입해 큰 성과를 거뒀다. LCCS 도입 이후 연간 2억6000만 달러(약 2600억 원)의 비용이 줄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3년 안에 거의 모든 글로벌 기업이 LCCS를 도입할 것으로 전망한다.

○‘역(逆)발상’을 통한 경영 합리화

LCCS는 기술 발전으로 제품이나 서비스의 품질 차이가 거의 없어지면서 ‘가격 경쟁력’이 더욱 중요해지자 나온 ‘발상의 전환’ 전략이다.

특히 전자 통신 자동차 가전 시장은 포화 상태로 접어들어 매출 성장이 더딘 데다 새로운 시장 개척은 한계에 부닥친 상황이다.

따라서 별 차이가 없는 기술 차별화에 주력할 게 아니라 비용의 60∼70%를 차지하는 재료비를 줄이자는 게 LCCS 전략이다.

LCCS는 품질이나 납기의 중요성이 낮은 부품이나 원재료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제품의 성능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부품 가격을 낮춰 원가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것.

최근에는 단순 부품 조달뿐 아니라 인사 서비스 업무를 해외로 옮기는 쪽까지 영역이 넓어지는 추세다. 미국 독일 등의 주요 제조업체들은 콜 센터나 소프트웨어 개발 업무를 인도 등으로 옮겨 비용 절감 효과를 보고 있다.

○북미와 유럽 중심으로 확산

외형 성장 위주에서 벗어나 수익성을 중시하는 쪽으로 변화를 꾀하고 있는 북미와 유럽의 제조업체들은 몇 년 사이 잇따라 LCCS를 도입했다.

현재 글로벌 기업의 15∼20%는 중국, 인도, 브라질, 체코 등 저(低)비용 국가에서 구매해 원가를 절감한다. 구매 수량과 품목도 계속 늘리는 추세다.

처음에는 자동차 관련 제조업체를 중심으로 시작됐지만 지금은 전기 전자 통신 등 정보기술(IT) 관련 업체들도 적극적이다.

대만의 최대 디지털 광학전자제품 생산 기업인 프리미어는 주요 자재 부품을 효율적으로 구매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 연구개발(R&D) 부문과 구매 부문 사이에 의사 전달이 잘못돼 필요한 부품을 제때 공급받지 못하는 일까지 생겼다.

하지만 LCCS를 도입한 뒤 연간 10%의 구매 비용을 절약하게 됐고, 이 과정에 협력업체들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 기준도 만들었다.

인도의 최대 자동차 부품업체인 TVS 그룹도 LCCS를 도입한 뒤 모든 구매 부품에 대해 12∼15%의 비용을 절약하고 있다. 일부 부품의 원가는 25% 이상 줄었다.

○연구개발과 시장 분석이 필수

전문가들은 LCCS가 효과를 제대로 내려면 연구개발 역량 강화와 부품 조달 시장 분석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말한다.

세계적 경영컨설팅 회사인 액센츄어 한국사무소의 정주영(상무) 컨설턴트는 “저비용 국가에서 조달할 수 있는 품목을 정확하게 가려내려면 R&D 역량이 필수”라며 “해당 국가와 업체에 대한 사전 분석을 통해 유리한 조건을 이끌어 내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LCCS 대상 품목을 잘못 판단하거나 해당 국가의 법 제도, 시장 환경, 업체의 기술력과 신뢰성 등을 잘못 분석하면 낭패를 보게 된다는 얘기다.

그래서 현지 구매센터를 통해 시장 분석과 현지 업체 발굴을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이를 통해 각종 세제 혜택이나 유리한 계약 조건을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경영 화두로… 국내 도입 움직임

국내에서도 LCCS를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일부 나타나고 있지만 아직 걸음마 단계다.

삼성전자는 자체 전문가 그룹으로 구성된 ‘협력업체 지도팀’이 국내외 부품 공급사의 생산성과 품질 향상, 원가 절감을 위한 공동 혁신 프로그램을 벌이고 있다.

현대자동차는 원가 절감을 위해 일부 부품을 국내 업체의 해외공장을 통해 들여온다.

하지만 대부분 현지 업체나 전문가가 아닌 자체 구매팀을 이용한 것이거나 일부 단기 납입 부품으로 해외 조달 품목을 한정하고 있어 본격적인 LCCS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가 많다.

정 상무는 “국내 기업들이 LCCS라는 시대적 흐름을 빨리 따라가지 않으면 해외 기업에 5년 이상 뒤처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생산 공장, 연구소의 해외 진출이 많아질수록 현지에서 적절한 부품과 서비스를 제때 조달하는 능력인 LCCS의 중요성이 커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상록 기자 myzodan@donga.com

:LCCS(저비용 국가 소싱):

인건비 재료비 등이 싼 국가의 현지 업체에서 핵심 부품을 제외한 나머지 부품이나 서비스를 사 와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경영 기법. 해외 부품 공급사에 대한 체계적 관리로 안정적인 부품 수급도 가능하게 해 준다.

북미-유럽기업의 86% “저비용國 소싱에 만족”

“LCCS가 뛰어난 비용 절감 효과가 있지만 혁신적인 제품 개발엔 걸림돌이다.”

경영컨설팅 회사 액센츄어는 지난해 LCCS를 도입하여 시행하고 있는 북미와 유럽의 238개 기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이같이 나타났다고 26일 밝혔다.

이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86%가 LCCS 도입에 따른 비용 절감 효과에 만족한다고 답했다. 대부분의 기업이 비용 절감을 위해 LCCS를 활용하고 있다는 뜻.

또 모든 응답자가 LCCS 비용을 앞으로 더 늘리겠다고 했다.

특히 통신 등 첨단 기술 분야 기업들은 현재 16% 수준인 LCCS 지출 비용을 3년 뒤 30%까지 늘리겠다고 응답했다. 자동차(17%→30%) 소비재(15%→30%) 분야도 같은 기간 LCCS 비용을 크게 늘릴 예정이라고 답했다.

응답자들은 LCCS로 인한 비용 절감 효과가 20% 수준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현재 14% 수준인 통신 첨단 기술 분야는 3년 뒤 24%, 15% 수준인 자동차 분야는 20%까지, 20% 수준인 공업 분야는 25%까지 비용 절감 효과가 각각 커질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새로운 제품을 만드는 혁신성과 창의성 부분에서는 각각 48%와 42%가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응답했다. 이는 부품 업체와의 상호 협력이 핵심인 LCCS 도입이 신제품 개발 등 보안을 필요로 하는 분야에서는 장애가 되기 때문.

LCCS 대상 국가로는 중국 인도 체코 폴란드 등이 선호 국가로 꼽혔다. 지역별 근접성보다는 생산단가나 차별화된 산업 특성에 따른 것이라고 액센츄어는 분석했다.

한편 LCCS 도입이 중소기업의 경영난을 악화시키고 일자리를 줄인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로 2004년 미국 대통령선거 당시 전미(全美) 제조업체협회의 중소기업 회원사들은 “대기업들의 LCCS 도입이 중소기업들의 가격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실업자를 양산한다”며 무분별한 LCCS를 정부 차원에서 규제해 줄 것을 강하게 요구했다.

당시 민주당 대선 후보인 존 케리 상원의원은 이런 입장을 지지했다. 하지만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LCCS 도입이 결과적으로 미국 전체 상품의 가격 경쟁력을 가져올 수 있어 이익”이라며 대기업의 LCCS 도입을 지지해 뜨거운 논쟁의 불씨를 지폈다.

김재영 기자 jaykim@donga.com

이상록 기자 myzod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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