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선심성 정책에 묻어있는 毒

  • 입력 2004년 1월 25일 18시 30분


‘직업이 장관’이란 말까지 들었던 진념 전 경제부총리. 그는 가끔 ‘선거의 폐해’를 이야기한다. 없는 집 제사 돌아오듯 잇따르는 선거가 자주 정책을 왜곡시켰다는 말이다. 자신 역시 거기에서 자유롭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대선이나 총선이 임박하면 정치적 고려가 모든 것에 우선합니다. 나라를 위해 꼭 필요한 정책도 표를 떨어뜨린다고 판단되면 ‘스톱’이죠. 반면 무리한 내용이라도 득표에 도움이 되면 추진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최근 각 정부부처는 동시다발적으로 ‘민생 정책’을 쏟아냈다. 설 연휴를 앞두고 두드러졌다. 장차관의 ‘총선 징발설’이 나도는 보건복지부 노동부 재정경제부 등이 총대를 멨다.

몇 가지만 살펴보자. 공무원 1만명 등 공공부문 일자리를 8만여개 늘린다. 평균 정년을 60세로 연장한다. 아이를 낳을 때 20만원의 출산장려금을 지급하고 영유아 보육료 지원 대상도 확대한다. 경부 및 호남고속철도는 총선 직전인 4월 1일 개통한다 등등….

대부분의 정책은 돈을 벌기보다는 쓰는 정책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당연히 재원은 우리 호주머니에서 세금이라는 형태로 나가거나 나랏빚으로 다음 세대에 전가될 것이다. 혜택을 받는 사람은 있지만 부담이 누구에게 돌아가는지는 가려져 있다.

‘선심성 정책’을 정확히 정의(定義)하기란 쉽지 않다. 정책과 정치적 요인을 두부 모 자르듯 구분하는 것도 어렵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처럼 많은 경우 세상사의 진실은 단순하지 않다. 그렇다면 ‘비용-편익 분석’과 현실 적합성이란 잣대로 허실을 따져 보자,

‘철밥통’인 공무원 자리 1만개를 늘린다는 것. 일자리를 찾는 젊은이들에게 분명히 반가운 소식이다. 기존 공무원들도 마다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작은 정부’라는 세계적 대세에 역행하는 정부조직 비대화와 재정부담 증가, 규제의 칼날을 휘두르는 데 익숙한 우리 공직사회 풍토를 감안하면 종합적인 득실은 과연 어떨까.

정년 연장도 그렇다. ‘사오정’ ‘오륙도’가 피부에 와 닿는 세상에서 60세까지 직장생활이 보장된다면 필자부터 쌍수 들고 환영하겠다. 그러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마른 수건도 다시 짜는 민간기업이 경쟁력에 관계없이 모든 직원을 60세까지 끌어안으라는 정책이 얼마나 현실성을 가질까.

요즘 나온 각종 대책은 복지정책의 성격이 짙다. 총선이 가까워질수록 더 기승을 부릴 가능성이 높다. 이해집단을 의식한 정책도 쏟아질 것이다.

하지만 모든 선택에는 대가(代價)가 있다. 만병통치약은 없다. ‘희생 없는 번영’이란 공약(公約)은 대부분 공약(空約)으로 끝난다. 수혜자는 분명한데 피해자가 불분명한 정책일수록 부담은 ‘조용한 다수’에게 돌아간다.

선심성 정책은 당사자들에게는 우선 달콤할지 모른다. 하지만 국가나 전체 국민 입장에서는 때로 치명적인 독(毒)이 묻어 있다. 한 페이지마다 묻어있는 독은 소량이지만 책장을 덮을 때쯤 치사량을 넘는다.

경제정책의 목표는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성장의 실현’이다. 지금 정부와 정치권의 최우선 과제는 국부(國富)를 함부로 쓰기보다 벌어들이는 것,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휘청대는 경제를 살리는 것이다. 길게 보면 진정한 복지확대도 그 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권순활 경제부 차장 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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