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CEO들 “자고나면 딴세상…배워야 생존”

  • 입력 2002년 12월 5일 16시 11분


공부 모임에 참여하는 최고경영자(CEO)들에게 ‘왜 공부를 하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비슷한 대답을 한다. “경영 환경이 급변하는 시대에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라는 것.

기업을 둘러싼 각종 변수의 변화 속도가 갈수록 빨라지는 요즘 시대에 조금이라도 뒤진다는 것은 곧 생존 경쟁에서의 탈락을 의미한다.

미국 유통업체 홈데포의 공동 설립자인 버니 마커스는 갈수록 치열해지는 생존 경쟁에서 하루 하루를 보내는 CEO들의 위기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오늘날과 같은 경영 환경에서 CEO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늘날의 CEO는 퍼붓는 총탄 속을 포복으로 기어가는 병사와 같다.”

미국 소프트웨어 업체 피플소프트의 CEO 크레이그 콘웨이는 CEO의 가장 큰 고충으로 ‘시간과의 싸움’을 들었다.

“CEO는 가족에게 봉사할 시간 또는 자신의 일에 대한 시간 중 하나는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리인데 이러한 딜레마를 효과적으로 극복한 CEO는 아마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아라

LG경제연구원이 최근 내놓은 보고서 ‘CEO들의 서바이벌 게임’은 이같은 CEO들의 위기감이 막연한 데서 오는 게 아니라 실제 업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임을 잘 보여준다. 보고서는 해마다 짧아지고 있는 CEO들의 재임 기간에 대한 통계를 실었다.

미국의 컨설팅회사 부즈앨런해밀턴이 세계 25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최근 조사한 바에 따르면 CEO들의 평균 재임 기간은 1995년 9.5년에서 지난해에는 7.3년으로 줄었다. 한 해에 경영자가 바뀌는 비율은 1995년 6%에서 지난해는 9.2%로 높아졌다.

한국의 경우는 더 심하다. 지난해 국내 100대 기업을 조사한 결과 국내 CEO의 재임 기간은 평균 2.6년에 지나지 않았다. CEO로 뽑힌 뒤 2, 3년 안에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이창엽 연구원은 “CEO들의 재임 기간이 단축되는 것은 그만큼 산업이나 기술의 변화가 빠르게 전개되고 있어 이러한 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전문가들이 기존 CEO들을 빠른 속도로 밀어내고 있음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변화의 속도에 대한 CEO들의 불안감은 학습에 대한 욕구를 키웠다. 삼성경제연구소가 2월 일반에게 공개한 세리CEO(www sericeo.org)에 대한 호응은 CEO들이 얼마나 학습에 목말라 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11월말 현재 100만원의 연회비를 내고 가입한 회원은 2800여명에 이른다. 회원의 3분의 1이 CEO이거나 임원진이다. 업종별로는 고려제강 금호그룹 등 제조업이 1238명으로 가장 많고 그다음이 국민은행 기업은행 등 금융업으로 944명.

세리CEO 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강신장 상무는 “4, 5년 전만 해도 기업에서 공부를 하는 사람은 부장급 이하 직원들이었고 CEO나 임원들은 대학에 개설된 최고경영자 과정에 이름을 올려놓는 정도였다”며 “외국유학경험이 있고 새로운 것을 습득하는 데 마음이 열려있는 젊은 CEO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최고경영자층 전반에 ‘학습 문화’가 퍼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하이브리드형 정보 즐겨찾아

세리CEO에 실리는 내용은 지난해까지는 삼성계열사 임원진만이 볼 수 있는 비공개 자료였다. 이 사이트는 크게 경영 경제의 최신 트렌드, 성공 리더십 마케팅 사례, CEO에게 도움이 되는 교양 상식 등을 5분 안팎의 동영상 자료로 요약해 제공한다. 콘텐츠는 연구소 연구원과 외부 전문가가 절반씩 만들고 매일 새로운 내용이 4편씩 추가된다. 소재는 국내외에서 발행되는 각종 책과 잡지, 삼성 사장단에 보고하는 정보 내용 등에서 선택한다.

특히 인기 있는 코너는 다양한 사람들의 리더십 사례를 소개하는 ‘감성 리더십’, 신간 도서를 요약해 주는 ‘북 리뷰’, 산업별 최신 이슈를 진단하는 ‘산업 전망대’ 등이다.

‘감성 리더십’ 코너를 즐겨 본다는 하나은행의 이정세 상무는 “전문적이지 않은 소프트한 이야기들 속에서 업무에 적용할 수 있는 교훈을 얻을 수 있어 좋다”고 평가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강의는 ‘피아노의 시인 앙드레 가뇽’.

강의에서 정진홍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바다 위에 떠있는 피아노를 상상해보라”고 주문한다. 정 교수가 강조한 점은 “당신은 고정관념에 빠져 형식만을 따지지는 않는가”라는 것. 사무실과 회의장에서도 마음껏 상상력을 발휘해 ‘바다 위의 피아노’를 꿈꿀 수 있는 일터를 만들어보라는 조언이 뒤따른다.

이 상무는 “요즘처럼 급격한 변화가 진행되는 시기에는 사고에 유연성이 있어야 한다는 점, 조직원 개개인의 능력을 끌어내야 하는 CEO들은 특히 열린 사고를 해야 한다는 점 등을 배웠다”고 밝혔다.

연구소측은 최근에는 ‘신세대 따라 잡기’ ‘여자가 할 일 남자가 할 일’ 등 주요 소비 계층인 신세대와 여성에 대한 콘텐츠가 인기라고 밝혔다. 또 일본은 아직 망하지 않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부활을 꿈꾸는 일본 업계’, 문화를 마케팅에 이용하는 사례를 소개한 ‘문화 빵인가, 잼인가’ 등이 11월에 높은 조회수를 기록했다.

이처럼 특정 분야에 직접 연관된 전문 지식이 아닌 주변 정보들에 대한 선호도가 높은 점에 대해 강신장 상무는 “요즘 경영 혁신의 화두가 하이브리드(잡종)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예전에는 경영 지식만 파고 들면 ‘답’이 나왔지만 지금은 아니다. 기업 내부 스태프에게만 의존해서도 혁신안이 나오기 힘들다. 중세사를 전공하고도 휴렛팩커드의 회장이 된 칼리 피오리나를 보라. 이제는 역사나 철학 같은 데서도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경영 지식이 나오는 시대다.”

●하루 공부시간 평균 15분

2800여 회원들이 세리CEO를 이용하는 행태를 보면 현재 한국의 CEO들이 어느 정도 수준으로 공부하는지에 대한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연구소 집계에 따르면 회원들의 일일 평균 이용 시간은 15분 안팎. 대략 2, 3개의 콘텐츠를 본다는 얘기다. 매일 새롭게 사이트에 올라오는 콘텐츠가 4개이므로 콘텐츠를 비교적 빼놓지 않고 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루 중 사이트를 가장 많이 찾는 시간대는 오전 11시에서 오후 1시 사이. 오전 회의나 업무 협의를 끝낸 다음 점심 시간 전후를 이용해서 ‘공부’하는 사람이 가장 많다는 뜻. 이 시간대 외에 출근 시간대인 오전 7∼9시, 퇴근 시간 전인 오후 4∼6시에도 조회 횟수가 높은 것으로 파악됐다. 회원인 한 시중은행의 부행장은 “출근하자마자 세리CEO를 보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한다”고 밝혔다. 한빛은행 이정세 상무는 “개인 휴대 단말기(PDA)에 일단 내용을 내려받은 뒤 출퇴근 시간을 이용해서 보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콘텐츠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얻거나 이용상의 문제점 등을 해결하기 위해 콜센터로 문의를 하는 사람은 하루 평균 30명가량이다.

CEO들이 세리CEO에서 얻은 지식은 자연히 부하 직원에게 전달된다. 한 중소기업의 CEO는 “파워포인트로 내용을 내려 받아 회의 때 활용한다”고 말했다. 회원 중에는 상사의 권유로 가입을 한 사람이 많다. 11월초 100명이 단체로 가입한 한 회계법인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 회사의 사장은 먼저 회원으로 가입한 뒤 전 임원에게 회원 가입을 권유했다. 이정세 상무도 김승유 행장의 권유로 가입했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이용규 과장은 “지난 추석 때 주변 지인들에게 회원 아이디를 만들어 주는 것으로 추석 선물을 대신한 CEO도 있다”고 소개했다.

금동근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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