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5년 한국 어떻게 변했나]④평생직장은 없다

  • 입력 2002년 11월 21일 17시 56분


“제 인생에는 세 번의 전환점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취직한 것, 두 번째는 결혼한 것, 세 번째는 외환위기 때입니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를 겪으며 인생의 목표와 계획이 모두 달라졌습니다.”

제일기획에서 광고기획을 맡고 있는 A차장(36). 그는 입사 6년차였던 외환위기 당시의 회사 분위기를 잊지 못한다. 광고계에 불황이 몰아치면서 선배와 동료 가운데 20% 이상이 명예퇴직으로 직장을 떠나던 뒷모습….

‘명퇴 바람’이 잠잠해진 뒤에는 벤처열풍이 불어왔다. 후배 중 상당수가 “회사만 믿고 있을 수 없다. 기회가 있을 때 한몫 잡겠다”며 만류를 뿌리치며 ‘테헤란밸리(서울벤처밸리)’로 나섰다. 그 중 몇몇은 지난해 다시 회사로 돌아왔다.

“집을 팔아서라도 유학을 가자니 늦은 것 같고, 10년 뒤에도 이 회사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고…. 있는 동안 열심히 일하면서 나이 마흔이 넘어 창업할 기회를 찾으렵니다.”

IMF 관리체제의 충격은 A차장 같은 ‘보통 회사원’의 삶까지 뿌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잊혀진 전설 ‘평생직장’〓한국노동연구원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 10월 155만9000명이던 30대 그룹과 금융기관, 공기업의 직원 수는 2001년 10월 122만2000명으로 줄었다. 4년 만에 전체 직원의 21%가 감소한 것.

구조조정에 따른 명예퇴직과 해직으로 ‘평생직장’이나 ‘종신고용’의 개념은 ‘옛 이야기’로 묻혀버렸다. 대기업이 상시 구조조정체제를 갖추며 회사원들이 느끼는 ‘심리적 정년’은 크게 낮아져 ‘사십오세 정년’을 줄인 ‘사오정’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중국 베이징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김모씨(43). 그는 1995년 국내 유수의 대기업이 운영하는 한 민간연구소에 중국전문가로 특채돼 일하다가 2000년 2월 K대학 부교수 제의를 받고 곧장 자리를 옮겼다.

김 교수는 “나이 든 연구원이 맡을 자리가 몇 안 되는 상황에서 외환위기를 겪으며 심한 불안감을 느꼈다. 연봉은 절반으로 줄었지만 오래 일할 수 있는 직장을 확보했다는데 만족한다”고 말했다.

외환위기 이전까지 찾아보기 힘들던 비(非)자발적 이직도 일상화됐다. 한국노동연구원 전병유(田炳裕) 연구위원의 연구에 따르면 외환위기 이전인 1995년 말부터 1년간 3% 수준이던 비(非)자발적 이직률은 2000년 말부터 1년간 31.1%로 10배 이상 뛰어올랐다. 해고로 인한 이직도 같은 기간 0.8%에서 16.1%로 껑충 뛰었다.

▽성과주의 확산과 사내(社內)경쟁의 가속화〓구조조정의 찬바람을 겪고 난 회사원들은 1999년과 2000년 불어닥친 ‘벤처열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았다. ‘자기 비즈니스’에 대한 열망과 높은 보수를 쫓아 벤처기업으로 속속 자리를 옮긴 것.

고려대 경영대 문형구(文炯玖) 교수는 “대기업의 회사원들은 외환위기로 인한 고통을 현실로 받아들이면서도 회사로부터 심한 ‘배신감’을 경험했다. 이 과정에서 충성도가 약해진 회사원들은 벤처열풍을 일종의 ‘탈출구’로 받아들였다”고 설명했다.

기업 경쟁력 강화와 ‘핵심 인력’의 벤처기업 유출을 막기 위해 대기업들은 강력한 성과급을 포함한 연봉제를 속속 도입했다.

삼성전자 가전사업부의 박모 차장(42)은 “연봉제가 확산되면서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다. 때가 되면 누구나 되던 ‘부장’ 승진에서도 20∼30%가량 탈락하고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불필요한 인력’은 도태된다”고 말했다.

경영자총협회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대상기업 1326개 중 66.8%가 연봉제를 실시했거나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특히 1000인 이상 대형 사업장의 절반이 넘는 60.9%는 이미 연봉제를 실시하고 있다.

▽IMF 체제가 가져온 기회〓“외환위기 당시 기업들은 평생직장을 기대할 수 없는 분위기에서 일방적인 헌신을 요구했다. 그렇다면 나도 시장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위기가 없었다면 그런 결정을 내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1999년 국내 유수의 D정보통신업체를 그만두고 창업투자회사 심사역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최근 벤처기업을 세운 홀로미디어랩의 김정국(金正國·34) 사장의 말이다.

LG경제연구원의 이춘근(李春根) 연구위원은 “외환위기가 직장인들의 고용안정성을 악화시켰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위기가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외환위기는 조직에 의존해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개인들이 자신의 역량을 ‘시장가치’로 인식하고 경력을 관리하도록 만들어 개인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고 분석했다.


박중현기자 sanjuck@donga.com

배극인기자bae2150@donga.com

나성엽기자 cpu@donga.com

●대기업 K과장의 하루

대기업에 근무하는 김모 과장(36). 입사 10년차인 김 과장은 요즘 오전 7시에 출근한다. 공식적인 출근시간이 오전 8시지만 미리 회사에 나가 영어공부를 하기 위해서다. 내년 3월 연봉계약을 앞두고 매달 치르는 토익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얻기 위한 것.

“고3 때보다 공부를 더 열심히 합니다. 성적으로 모든 것을 보여주는 프로야구 선수가 된 셈이죠.”

오전 8시부터는 업무와의 전쟁이 펼쳐진다. 전화로 영업소 후배에게 전날 밤 부탁한 물품 구매 계약건에 대한 문의를 하고 임원에게 계약 진행 사항을 보고하는 등 눈코 뜰새 없이 바쁘다.

잡무도 많다. 서류 복사는 기본이고, 손님 안내까지 해야 한다. 바쁠 때는 차도 직접 만들어 대접해야 한다.

“입사 초기에는 과장이 상당히 높아 보였습니다. 부하 직원에게 명령만 내리면 됐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구조조정이 되면서 과장이 사환이 된 느낌입니다.”

오전 11시50분. 업무에 시달리던 김 과장은 곧바로 구내식당으로 직행한다. 정오부터 시작하는 영어학원 강의를 듣기 위해서다. 가끔 동료들과 함께 외부에 나가 맛있는 식사를 하고 싶은 충동도 있지만 장래를 위해서는 ‘자기계발’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 구내식당으로 발길을 돌린다.

“외환위기 이전에는 부원들끼리 자주 뭉쳤습니다. 회사 차원의 부서 지원비가 많아 회식도 많았고, 술도 자주 마셨죠. 그러나 지금은 점심을 같이 먹기도 힘드네요.”

오후 1시. 김 과장은 허겁지겁 사무실로 돌아온다. 밀린 업무를 빨리 처리하고 공인중개사 자격증 공부를 하기 위한 것. 부장 눈치가 보이기도 하지만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 안에서 시험준비를 하는 것이 어떠냐”는 생각에 틈틈이 책을 본다.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회사가 직원들을 평생 돌보지 않는다는 것을 직접 겪었습니다. 경쟁력이 없으면 곧바로 잘린다는 얘기죠. 지금 미래에 대한 투자를 하지 않으면 낭패를 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오후 8시 업무를 마친 김 과장은 회사를 나서 집으로 향한다. 피곤함이 엄습하지만 집에 있는 아내와 아이들을 떠올리면 힘을 내야 한다는 생각이 샘솟는다. 회사에서 잘린 선배가 남긴 “세상에 믿을 것은 경쟁력뿐”이라는 말이 귓가에 맴돌며….

송진흡기자 jinhup@donga.com

●전문가가 본 샐러리맨 심리상태

외환위기 이후 샐러리맨의 심리 상태는 어떻게 변했을까.

인제대 의대 서울백병원 신경정신과 우종민(禹鍾敏) 교수는 “많은 기업이 합리와 효율이라는 기준에 맞춰 변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며 “의사결정과정의 핵심 라인에 온존하는 비합리와 비효율이 직장인의 정신 건강을 해치고 있다”고 진단했다.

우 교수는 지난해 10월부터 1년 동안 한국산업안전공단, 부산대병원 산업의학과와 함께 서울 부산 인천 등 전국 대도시의 사무직 서비스직 생산직 근로자 100명을 대상으로 심층 상담을 진행했다. 1인당 상담시간은 평균 2시간.

상담 대상 가운데 10%(10명)는 직무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과 불안 장애, 불면증 등으로 정신과 치료가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최근 부쩍 강조되는 ‘고객만족’ ‘고객감동’ 등의 용어가 서비스직 종사자에게 주는 부담감은 위험 수준이라고 우 교수는 강조했다. 외환위기 이후 대부분 임시직으로 바뀌어 고용불안을 느끼는 상황에서 고객의 항의라는 ‘암초’가 스트레스를 가중시키기 때문.

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 권준수(權俊壽) 교수는 “과거 정신적 문제가 생겼을 때 도움을 주던 ‘지지그룹(Support Group)’이 사라지면서 만성적인 정신 질환을 앓을 가능성이 더욱 커졌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지지그룹은 회사 동료였으나 외환위기 이후 이들이 경쟁그룹으로 바뀌면서 고민을 털어놓을 상대가 없어졌다는 것.

고려대 안암병원 정신과 이민수(李敏秀) 교수는 “최근 50대 임원을 중심으로 ‘외상(外傷) 후 스트레스 장애(PTSD)’나 강박 장애를 앓는 사람이 많다”고 지적했다. PTSD는 외환위기 등 대형 사건이나 사고, 전쟁 해고 죽음 등 예기치 못한 불상사를 겪거나 목격해서 생기는 정신 질환.

이 교수는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임원 중에도 상시적 구조조정에 대한 압박감 때문에 ‘안 해도 될’ 해고 걱정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다”며 “이는 외환위기가 남긴 일종의 ‘마음의 상처’”라고 말했다.

차지완기자 marudu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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