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듀2000 새희망2001]"고객 항의에 말한마디 못했죠" …현대증권 이재호지점장

  • 입력 2000년 12월 25일 18시 36분


“아빠, 오늘은 올랐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초등학생 막내가 불쑥 한마디 던진다. 오늘은 주가가 올랐느냐는 물음이다. 주식이 뭔지, 오르고 내리는 게 무얼 의미하는지도 모를 나이지만 저도 제 나름대로 아빠의 심기를 가늠해보는 방식을 터득했나 보다. 중학교에 다니는 큰아이는 짐짓 다 안다는 표정으로 일터에서 돌아온 아빠를 맞이한다.

현대증권 무역센터지점 이재호(李載虎·43·사진)지점장. 막내의 질문에 단 한번도 “그래, 엄청 올랐다”고 시원하게 대답해주지 못한 올 한해는 정말이지 뒤돌아보기도 싫은 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올 4월 지점장으로 발령받아 나온 뒤부터 주식시장은 줄곧 미끄럼을 탔기 때문.

이지점장에게는 묘한 징크스가 있다. 그가 지점으로 나와 근무를 시작하면 주가가 내리고 본사로 발령받아 들어가면 주가가 오른다는 것. 97년부터 2년간 자양동 지점장을 한 뒤 본사로 배치받았을 때도 그랬다. 그래서 동료들이 그에게 붙여준 별명은 ‘휴먼 인덱스’.

그는 “우연의 일치겠지만 지금 같아선 당장이라도 지점 생활을 접고 본사로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징크스가 되풀이돼 증시가 반등해주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나타내는 것. 그야말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을 이 한마디에서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언제부턴가 업무가 끝나면 헬스클럽을 찾아 러닝머신에 오르는 습관이 생겼다. 아무 생각 없이 달리면서 하루 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조금이라도 떨어내지 않으면 하루하루를 버텨내기가 힘들기 때문.

자신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이지점장은 고객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볼 때가 가장 괴롭다고 한다. 주가가 본격적으로 빠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지점장실을 찾는 손님이 늘어났다. 하소연을 하는 손님에서 항의를 하는 손님까지 고객들의 반응도 다양하다. 얼마 전에는 퇴직금을 모두 주식에 투자한 나이 지긋한 손님이 찾아왔다.

“퇴직금 2억원이 지금 7000만원밖에 안남았다고 하더군요. 그것말고는 모은 재산이 하나도 없다고, 부인에게 차마 털어놓지도 못하고 있다고 하소연을 하는데 뭐라고 해줄 말은 없고….”

지점에서 추천한 간접상품에 투자했다가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하겠다는 손님도 있었다. 손해가 늘어나도 늘 점잖기만 하던 중년의 여자손님이 최근 “증권사에서 손님을 속인 것 아니냐”고 항의해 왔을 땐 “죄송하다”는 말조차 꺼내기 힘들었다. 이지점장은 “그래도 가끔씩 수고한다며 간식거리를 직원들에게 일일이 건네는 손님을 보면 힘이 솟는다”고 말했다.

새해 소망을 묻자 그는 대뜸 “신뢰감 회복”이라는 말부터 꺼냈다. 정부의 경제정책이 일관성 있게 추진돼 투자자들의 신뢰감이 회복됐으면 한다는 말이었다.

“내년에도 증시가 회복될지 어떨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기업의 실적과 전망이라는 교과서적인 원칙에 따라 투자할 수 있는 분위기만이라도 형성됐으면 합니다. 올해는 너무 많은 외적인 변수가 증시를 괴롭혔잖아요.”

개인적인 소망으로는 가족의 건강을 첫손에 꼽았다. 그리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현대그룹이 하루 빨리 정상화됐으면 한다는 희망을 덧붙였다.

<금동근기자>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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