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ighting ⑤]「氣찬」 남편 만들기

  • 입력 1998년 2월 12일 19시 35분


건설자재 납품업체인 P산업 차장으로 있던 남모씨(38). 아내 김모씨(38·전업주부)와 9세 6세의 두 딸을 ‘먹여 살리던’ 그가 권고사직한 것은 지난해 11월24일. 당시 연봉 2천5백만원.서울 수유동 24평 연립주택 거주. 집 살 때 3천만원을 대출받아 갚을 돈이 2천만원 남았고 매달 35만원(이자율 12.5%)을 이자로 낸다. 퇴직금은 기약 없고 ‘특별위로금’ 3백만원에 고용보험으로 석달간 받을 3백만원, 예금 4백만원을 더해도 총재산은 ‘집 한채+1천만원’. ‘원수 같은’ 생활비가 한달 최소 70만∼80만원. 앞으로 10개월이면 잔고는 바닥. 졸지에 ‘집구석’에 들어앉아 “하루가 이렇게 긴 줄 몰랐다’며 고개를 떨군 남씨. 쿠오바디스! 가라앉는 선채. 당황하는 ‘선장’. ‘갑판장’ 아내 김씨가 말하는 ‘남편,이렇게 기살리자’. ▼ 먼저 자신을 평정하고 ‘통큰체’하라 매일 새벽 1,2시에야 들어오던 남편이 종일 트레이닝복 입고 뒹구는 ‘꼴’을 1주일 정도 보니 속이 뒤집힌다. “누가 실업자 아니랄까봐, 초라하게 들어 앉아 있느냐”며 TV축구중계를 보던 남편에 대고 소리쳤다. ‘성질’하면 둘째 못가는 남편. 그러나 “으응…”하며 안방으로 사라진다. 종일 누워 지내 뒤통수에 만들어진 까치집을 바라보니 남편도 불쌍하고 자신도 불쌍해 울었다. “여보, 힘내. 풀죽어 병이라도 나면 다시 출근할 기회도 없잖아?” 마음을 잡은 김씨. 속터져봐야 뭐하랴.지난 한달 먼 친척이 하는 식당 허드렛일을 돕고 50만원 받아왔다. 남편은 엄청 자존심이 상했다. “돈 떨어지면 내가 막노동이라도 하든지 ‘확’ 다 죽든지 하면되지, 그까짓 일을 왜 하느냐”는 남편에게 뭔가 ‘아등바등’하는 모습을 보여선 안된다고 결심. 어차피 경제난 취업난은 오래갈 것이고 ‘이럴 때일수록 대범’이라는 생각에 김씨는 동덕여대 사회교육원에 등록했다. 1백10만원이나 하는 등록금이지만 1년 뒤면 집에 놀이방 하나 차릴 수 있다. 정말은 ‘밥벌이 투자’지만 남편은 그래도 ‘배우는’거라 불만이 적고. 보름에 한 번 하던 외식(주로 돼지갈비집에서 일가족 4만원 정도)도 그만두자는 남편 말에 “몇푼 든다고 졸아서 그러느냐”며 통큰 체. 김씨는 “남편이 가장 힘들어 하는 것은 ‘실직’이 아니라 ‘내가 돈벌지 않으면 아내와 딸들이 굶어죽는다’는 불안감일 것”이라며 “남편이 ‘서운할’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한다”고 말한다. ▼ 아내로서, 친구로서, 어머니로서 일단 남편이 ‘집에 틀어박혀 있는’ 것에 익숙해지는 걸 막는 게 김씨의 최대 목표. 남편을 다그쳐 아침 7시 아이들과 인근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조깅. 동네 사우나에서 몸도 풀고 잡담이라도 나누라고 ‘내몬다’. 그래도 ‘죽치려고’ 하면 “설거지 도와라” “집안 청소해라”며 귀찮게 군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무력감에 낮잠으로 소일하는 남편에게 ‘뭔가 하고 있다’는 존재의미를 심어 주자는 것. 실직 2개월이 지나니 남편은 그 잘 만나던 선후배, 친구들도 서서히 피한다. “이럴 때 일수록 적극적으로 만나야 한다”고 다그쳐도 듣지 않으면 ‘부부동반’으로 식사라도 하자고 제안한다. 실직자 아내의 다른 이름은 ‘전지전능’. 남편을 ‘확실’하면서도 ‘안보이게’ 챙긴다. 요즘은 노동사무소와 신문사 취업정보센터를 찾아 취업정보를 모아다 준다. 단 “이런 구인처가 있는데 한번 연락해봐” 식 보다는 “이런 게 있는데 난 뭐가뭔지 모르겠어”하며 어수룩하게 건넨다. 요즘 남씨는 새벽 4시면 깨어 문앞에 쭈그리고 앉아 조간신문을 기다리는 버릇이 생겼다. 불면증은 남편 최대의 적(敵). “웬 궁상”이냐며 핀잔주면 돌이킬 수 없다. 남편을 따라 일어나 ‘함께’ 쭈그리고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바보같은 놈들, 이렇게 능력있는 사람을 해고하다니. 어딘지 모르지만 당신 데려가는 데는 봉잡았다, 봉잡았어”. 남편의 자존심 살리는 얘기가 주 메뉴. “남편에게 필요한 건 가족을 대신 ‘먹여살릴’ 아내가 아니에요. 기댈 수 있는 ‘친구’, 못났어도 질책하지 않는 ‘어머니’일 겁니다.” 김씨의 ‘큰아들’ 기르기 출사표다. 〈이승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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