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국제통화기금(IMF)이 5일 공식 발표한 합의문은 자금지원 조건의 대략적 방향만 담고 있을 뿐 자세한 조치와 일정은 밝히지 않고 있다. 은행과 재벌의 운명을 좌우할 구체적인 내용 등은 「기술적 이행문서」에 담겨 있지만 일절 공개되지 않는다. 합의문이 법률이라면 기술적 이행문서는 시행령에 해당된다.
이 문서의 비공개조치는 IMF 자금지원의 조건 중 하나다. 재정경제원 정덕구(鄭德龜)제2차관보는 『이행문서의 비공개원칙이 깨질 경우 IMF가 어떤 태도를 보일지 예상하기 어렵다』며 이 문서의 공개는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 내용에 관심이 쏠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행문서의 내용에 따라 은행의 운명, 재벌의 운명뿐 아니라 나라의 운명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
이행문서에는 은행과 종합금융사의 정리방법과 기준, 무역자유화조치의 세부내용, 금융 및 자본시장의 개방, 세율조정 내용 등이 구체적으로 들어있다.
우선 금융기관 정리방안에 대해 합의문에는 「회생 불가능한 부실금융기관은 문을 닫아야 한다. 퇴출정책은 대내외 투자가들에 의한 인수합병뿐만 아니라 폐쇄도 포함한다」고 돼있다.
회생 불가능의 기준이 무엇인지, 또 어느 금융기관을 언제 어떤 방식으로 정리할지에 대한 내용은 이행문서에 담겨 있다.
미국의 통상적 기준을 적용했다면 금융기관 몇개는 폐쇄조치가 불가피해진다. 또 정리시기를 이달말로 했다면 충격적 조치들이 곧바로 나타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같은 사항은 그야말로 극비다. 폐쇄조치의 가능성만 비쳐도 예금인출사태가 벌어지는 판에 이를 그대로 발표할 경우 상상하기 어려운 신용공황이 우려되기 때문.
금융기관 폐쇄는 예금자보호 및 기업도산방지 대책 등 완벽한 사전준비를 마친 뒤 전격적으로 이뤄지는 게 정상이다.
정부와 IMF는 98년중 외국은행의 현지법인 설립을 허용키로 했지만 시기와 허용폭은 합의문에 나타나 있지 않다. 이행문서에 미국 일본 등 특정국가 특정은행들이 국내에 진출할 때 최대한 협조한다거나 몇개 이상은 반드시 허용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미국계 은행들이 한국 진출을 서두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무역자유화조치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때 약속한 일정을 지킨다는 게 합의문의 골자다. 하지만 수입선 다변화 제도의 폐지도 당초 일정보다 크게 앞당겨지게 된다. 구체적으로 전자제품 자동차 등에 대한 수입제한 폐지 일정이 이행문서에 담겨있다. 내년 1월이 될지, 연말이 될지가 이행문서에 적혀 있는 것.
재벌정책도 재무제표 투명성 제고, 상호지급보증 해소, 과다부채 해소 방안 등이 이행문서에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당장 내년초에 상호지급보증을 모두 해소하라는 요구가 들어갔을 가능성도 있다.
이와 관련, 미셸 캉드쉬 IMF총재가 「재벌해체」를 공식 언급한 점은 의미심장하다.
또 노동정책과 관련, 합의문에는 「유연성을 제고하는 추가적 조치」라고만 언급돼 있지만 이행문서에는 인수합병이 시급한 금융기관부터 정리해고제를 곧바로 도입하는 방안이 수록됐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결국 이행문서는 은행과 기업은 물론 근로자의 살생부(殺生簿)가 되며 내용 하나하나가 엄청난 충격을 던져줄 것이라는 얘기다.
〈임규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