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퇴근길에 가락동 농수산물도매시장에 들렀다며 포도를 한상자 사들고 왔다. 아이들은 워낙 포도를 좋아하는지라 어깨에 맨 상자를 내려놓기도 전에 빨리 먹고 싶다고 야단법석이었다. 상자를 열어보고 난 아이들의 실망스러운 눈빛을 생각하면 지금도 어이없고 기가 막힌다.
포도는 봉투에 싸여 있었지만 송이를 드는 순간 바짝 마르고 앙상한 가지만 올라올 뿐 알맹이는 모두 종이봉투 속에 떨어져 있었다. 곰팡이가 포도송이의 반은 차지하고 있었고 말라비틀어진 알맹이는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상태였다.
대부분 상자도 뜯어보지 않고 상인의 말만 믿고 사는 남자들의 습성을 악용해서 선량한 소비자를 우롱하는 상혼에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작은딸이 『아빠는 왜 썩은 포도를 사왔어』 하고 물었지만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추석이 다가오는데 제수도 장만하고 인사드릴 친지에게 과일상자도 보내야 하는데 괜히 근심이 앞섰다. 동네가게보다 더 비싼 가격에 썩은 포도를 사온 남편은 괜히 머쓱해져서 아이들 먹을 포도를 사러 다시 나갔다. 서로 믿고 살 수 있는 상거래가 언제나 이루어질지 한심하다.
조윤숙(서울 강남구 일원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