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군무 무한반복… 새 신발 밑창 하루 만에 뜯겨나갔다

히어로콘텐츠팀 입력 2021-07-23 03:00수정 2021-07-23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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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한국산 아이돌
<4> K팝 뮤직비디오의 ‘피 땀 눈물’
3분의 완벽을 위해 셀 수도 없이 샌 밤들
알아주지 않아도 억울할 것은 없다
아이돌 그룹이 데뷔하고 나면 여러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그중 뮤직비디오 촬영은 이후 활동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승부처다. K팝은 ‘칼군무’와 수려한 패션, 외모를 고루 갖춘 ‘보는 음악’을 앞세워 전 세계 팬들을 사로잡고 있다. 뮤직비디오는 3분 남짓한 영상이지만 나흘 연속으로 이어지는 밤샘 촬영의 결과물. 한정된 예산 내에 최고의 장면을 뽑아내기 위해 격렬한 군무를 무한 반복하는 아이돌 멤버와 밤샘 작업에 초연한 ‘K스태프’의 피, 땀, 눈물로 만들어진다. 갓 데뷔한 걸그룹의 ‘부상 투혼’ 촬영 현장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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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더 뽑아내야” 칼군무 무한반복… 새 신발 밑창 하루만에 뜯겨나갔다
컴백 쇼케이스를 준비하며 메이크업을 받고 있는 현빈.

“멤버들, 이동하실게요.”

올 2월 데뷔한 걸그룹 ‘트라이비’ 멤버 7명이 군무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강당으로 향하자 헤·메·스(헤어·메이크업·스타일리스트) 스태프의 긴 행렬이 이어졌다. 싱글 2집 뮤직비디오 촬영이 4일째 이어지던 4월 21일이었다.
트라이비 멤버들이 안무가(오른쪽)와 방금 춘 군무 뮤직비디오 장면을 모니터링하고 있다.

“아, 어떡해요!”

멤버 소은의 목소리였다. 메이크업을 마치고 대기실 문을 나서던 소은은 밑창이 달랑거리는 흰색 워커를 들어 보였다. 의상팀은 놀라는 기색 없이 곧바로 본드를 꺼냈다. “새 신발인데도 자주 떨어져요. 애들이 하도 춤을 추니까….” 이유주 스타일리스트가 말했다.

3일 전 뮤직비디오 촬영 때 하루 신었던 워커. 반복된 군무 촬영 하루 만에 밑창이 떨어져 의상팀은 급히 본드를 발랐다.
소은은 3일 전 제주도에서 뮤직비디오 촬영을 할 때 이 워커를 딱 하루 신었다. 그날 온 종일 이어진 군무 촬영 탓에 신발이 하루 만에 수명을 다한 것이다.

주요기사
○ 격렬한 군무에도 외모는 흐트러짐 없어야

요즘 K팝 아이돌 그룹의 ‘칼군무’를 보면 1세대 아이돌의 안무는 율동에 가깝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격렬하다. 쏟아져 나오는 아이돌 그룹들 사이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려면 고난도의 과격한 안무를 선보여야 한다. 안무를 직접 짠 안무가조차 처음부터 끝까지 ‘완곡’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트라이비 멤버 중에 메인 댄서인 현빈은 과격한 회전과 발차기 동작이 특히 많았다. 현빈은 군무 촬영 도중 잠시 쉴 때마다 촬영장 구석에 다리를 뻗고 앉아 발목에 파스를 뿌렸다. 다른 멤버들도 바닥에 널브러지듯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걸그룹은 고강도 안무를 소화하면서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예쁨’을 유지해야 하는 의무까지 감당해야 한다. 유튜브와 소셜미디어를 통해 주로 유통되는 K팝 아이돌 그룹의 뮤직비디오는 퍼포먼스는 물론이고 패션과 외모를 고루 갖춘 ‘보는 음악’으로 자리를 잡았다. 아무리 격한 동작을 하더라도 머리카락이 멤버의 얼굴을 가려선 안 된다. 긴 머리의 걸그룹 멤버들은 귀 뒤쪽의 머리카락을 고무줄로 단단히 묶어 고개를 숙여도 머리가 흘러나오지 않도록 고정한다.

“컷!”

잠시 촬영이 멈추자 헤·메·스 스태프들이 일제히 종종걸음으로 멤버들에게 달려갔다. 조금 전까지 담요를 들고 오던 이들이 이젠 선풍기를 들고 왔다. 해가 지자 서늘해진 기온에 스태프는 패딩 점퍼를 입었지만 멤버들은 반팔과 핫팬츠 차림에도 땀이 식을 새가 없었다.

군무 촬영 사이사이, 다시 촬영에 들어가기 1초 전까지 헤메스 스태프은 ‘완벽한 아이돌 비주얼’을 위한 노력을 계속한다.
헤어 스태프는 머리카락이 달라붙은 멤버들의 얼굴과 목의 땀을 닦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빗어 올려 스프레이로 고정했다. 메이크업 스태프는 화장이 날아간 부분을 작은 붓으로 덧칠했다. 스타일 담당은 춤추느라 내려간 양말부터 풀린 실오라기까지 매무새를 다듬었다.

다시 스탠바이 신호가 떨어지자 스태프들은 썰물 빠지듯 카메라 앵글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제껏 얼마나 격한 춤을 췄든, 멤버들은 매번 촬영이 다시 시작되기 전에 갓 메이크업 숍에서 나온 완벽한 모습으로 되돌아가 있어야 한다.
○ 3분 31초에 응축된 96명의 나흘
격한 ‘칼군무’를 반복하는 멤버들은 ‘컷’ 소리가 나면 바닥에 널브러지듯 주저앉았다.
이른 아침 시작해 새벽에 끝나는 게 다반사인 뮤직비디오 촬영 현장. 촬영장 구석에는 아직 뜯지 못한 촬영팀 스태프의 도시락과 커피 캔이 널브러져 있었다.

오후 11시가 조금 넘었을 때 분주하던 촬영장에 노랫소리가 뚝 끊기고 정적이 일었다. 스태프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소은이 주저앉아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멤버들이 소은을 눕히고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미끄러운 바닥에서 발을 비비는 춤을 몇 시간째 추다가 다리에 근육 경련이 난 것이다. 소은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촬영이 재개되자 현빈이 바닥에서 쉬고 있던 송선을 일으켜 세우고 있다.(왼쪽) 격한 군무를 추다보면 ‘피’를 보는 일도 잦다.
“저희 도와주시는 분들이 정말 많잖아요. 무대 감독님, 촬영 감독님, 헤·메·스 스태프분들까지 거의 100명이 계시는데 저 때문에 제작이 지연되니까. 이런 상황에서 다리에 쥐가 난 저 자신한테 너무 속상했어요. 마음 한구석이 너무 아프고….”

이런 모습을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도 편할 리 없다. 홍재환 감독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미 (뮤직비디오 촬영 전부터) 연습하느라 성치 않은 몸으로 춤을 추고 또 추고 하는 모습이 마음이 아프죠. 이런 상황에 멤버들이 지연되는 것 때문에 속상해하지 않았으면 해요. 본인은 몸의 한계치까지 최선을 다해 촬영을 하는 거니까요. 오히려 그 와중에 좀 더 찍어야 하는 저희가 미안하죠.”

정해진 뮤직비디오 제작 예산을 넘기지 않으려면 섭외한 장소에서 한정된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그림을 뽑아내야 한다. 4일간의 촬영을 계획해 놓은 경우에는 하루가 더 걸리면 예산을 20%가량 넘기게 된다. 멤버들은 체력이 닿을 때까지 군무를 무한 반복하는 수밖에 없다. 뮤직비디오의 역동적인 군무 영상은 수없이 렌즈를 바꿔가며 다양한 화각으로 촬영한 화면을 촘촘하게 이어붙인 결과다.

소은이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자 홍 감독은 평소보다 조금 더 큰 목소리로 외쳤다.

“군무, 이제 진짜 마지막이에요!”

자정이 다 돼서 마지막 오케이 사인이 났다. 촬영장에 멤버들의 환호성이 쩌렁쩌렁 울렸다. 현빈이 말없이 소은을 끌어안았다. 멤버들이 옷을 갈아입으려 대기실 문을 열었을 때 파스 냄새가 따갑게 코를 찔렀다.

이날 시간표상 촬영 시작은 오전 7시, 종료는 다음 날 오전 1시 30분이었다. 하지만 촬영은 다음 날 오전 4시가 넘어 끝났다. K팝 뮤직비디오 촬영 현장에서 이 정도의 초과 근무는 흔하게 벌어진다. 트라이비 대표 프로듀서 신사동호랭이는 “이 세계에서는 학벌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 대기업도 진출하려 한 적이 있지만 성공하진 못했다. 근무 여건 따지면서 일할 수 없는 세계이고 대기업의 느린 의사결정으로는 대응하기 힘든 상황이 많다”고 했다.



뮤직비디오 촬영 날. 군무 촬영을 앞두고 연습을 하고 있는 멤버들.
트라이비가 4일간 촬영했던 ‘러버덤’ 뮤직비디오의 재생시간은 3분 31초. 라면 하나가 채 다 익지 못하는 짧은 시간이지만 이 영상에는 멤버들을 포함해 모두 96명의 나흘 밤낮이 녹아 있다. 단순 셈법으로는 뮤직비디오 1분에 약 100명의 하루 이상이 응축된 셈이다. 물론 영상 안에 담길 춤과 노래를 완성하기까지 쏟은 시간을 더하면 1분에 담긴 시간의 무게는 수직 상승한다.

○ 가사 발음 하나까지… 모든 것은 계산된다
가수 아이유는 4월 한 방송에서 음반을 녹음할 때 발음 하나 하나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는지 설명한 적이 있다.

“노래 한 마디를 부르더라도 수백 가지 길이 있어요. 저만의 발음을 살리는 걸 중요하게 생각해요. ‘이 밤’을 발음할 때 ㅂ을 완전히 발음 안 하고 입술에 약간 공간을 넣어 ‘이 부암’으로. ㄱ 발음도 ㄱ과 ㅋ의 중간 발음으로. 보통 치찰음 계속 들으면 피곤해질 수 있어서 많이 빼는데 전 많이 살려서 포인트가 된다고 생각해요.”

연습실에서 보컬 연습 중인 켈리
트라이비가 5월 강남구 신사동 녹음실에서 ‘러버덤’ 녹음을 할 때도 가사 한 줄 한 줄의 발음을 두고 여러 의견이 오갔다. 멤버 진하가 “그 어느 때보다 더 자유로워 난” 구절 녹음을 시작했다. 프로듀서 신사동호랭이와 보컬 트레이너 김제이미는 첫 마디 시작 글자 발음에 힘을 줘서 리듬을 더 강하게 살려야 한다고 멤버들에게 강조했다. 진하가 부르는 이 가사 구절은 거의 이런 소리가 되어 갔다. “그 어느 때뽀다 떠 짜유로워 난.”

연습실 안 현빈. 가사에 필기를 해가며 노래를 연습하는 모습은 독서실 속 학생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메인 파트 녹음을 마치면 같은 부분을 똑같이 다시 부른다. 이른바 ‘더블링’ 사운드 작업이다. 같은 목소리가 쌓이면 더 안정적인 소리가 되는 효과 때문이다. 여러 버전의 소리를 비교해 들어본 신사동호랭이는 “너무 ‘짜유’로 들리나?” 하고 고개를 갸웃하더니 기본 사운드는 ‘자유’로, 더블링 사운드는 ‘짜유’로 해보자고 제안했다.

‘자’로만 녹음한 기본 사운드만 들으면 다소 힘이 떨어지지만 더블링한 ‘짜’를 덧입히면 보다 강력하고 단호한 느낌을 준다. 신사동호랭이는 “다소 과할 수 있는 ‘짜유’라는 발음을 이런 식으로 더블링을 통해 섞어 표현하면 후렴으로 이어지는 진하 파트에 힘이 실린다”고 했다.

○ 스케줄 아니면 연습실… ‘이진법’의 세계
컴백 전 자켓 촬영 중인 송선.

스케줄 아니면 연습실. 아이돌 그룹 멤버들의 하루는 이 두 개의 세계를 오가는 것으로 채워진다. 마치 두 개의 숫자만으로 수를 나타내는 이진법처럼, 스케줄 있을 때가 아니면 연습실에서 좀 더 완벽한 무대를 만들기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쏟는다. 격한 안무를 추면서도 음정이 불안하거나 음 이탈이 나면 그 영상은 인터넷 속에서 영원히 박제돼 ‘노래 못하는 아이돌’로 두고두고 남게 된다.

연습실에서 미용실로 이동하고 있는 트라이비 멤버들.
5월 18일 오후 6시 서울 광진구 ‘yes24 라이브홀’ 무대 카메라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트라이비의 싱글 2집 앨범 쇼케이스가 세상에 공개되는 순간이었다. 이 무대에 서기까지 7명의 멤버는 지독하고 고독한 ‘이진법의 시간’을 지나왔다. 하지만 이들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 아직 많다. 지난했던 노력이 증발해버리는 것은 순식간이다. 억울할 것은 없다. 이것이 아이돌의 숙명이라는 것을 멤버들은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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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취재: 김배중 임보미 위은지 기자

▽사진·동영상 취재: 송은석 기자

▽그래픽·일러스트: 김충민 기자

▽편집: 홍정수 기자

▽프로젝트 기획: 이샘물 이지훈 기자

▽사이트 제작: 디자인 이현정, 퍼블리싱 조동진 김하나, 개발 최경선 박유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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