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 후삼국 통일에 도움 준 ‘희랑대사’ 조각상 국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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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년 10월 21일 11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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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333호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문화재청 제공)© 뉴스1
국보 제333호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문화재청 제공)© 뉴스1
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은 고려시대 고승(高僧)의 모습을 조각한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을 국보로 지정했다고 21일 밝혔다.

국보 제333호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은 신라 말~고려 초에 활동한 승려인 희랑대사의 모습을 조각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초상조각으로서, 고려시대 때인 10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유사한 시기 중국과 일본에서는 고승의 모습을 조각한 조사상을 많이 제작했지만, 우리나라에는 유례가 거의 전하지 않으며 ‘희랑대사좌상’이 실제 생존했던 고승의 모습을 재현한 유일한 조각품으로 전래되고 있다.

희랑대사는 화엄학(華嚴學)에 조예가 깊었던 학승으로, 해인사의 희랑대(希朗臺)에 머물며 수도에 정진했으며,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큰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왕건은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해인사 중창에 필요한 토지를 하사하고, 국가의 중요 문서를 이곳에 두었다고 전해진다.

희랑대사좌상은 조선 시대 문헌기록을 통해 해인사의 해행당, 진상전, 조사전, 보장전을 거치며 수백 년 동안 해인사에 봉안된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이덕무(1741~1793)의 ‘가야산기’ 등 조선 후기 학자들의 방문기록이 남아 있어 전래경위에 대해 신빙성을 더해준다.

지정조사 과정에서 이루어진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의 과학 조사 결과, 이 작품은 얼굴과 가슴, 손, 무릎 등 앞면은 건칠로, 등과 바닥은 나무를 조합해 만들었고 후대의 변형 없이 제작 당시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앞면과 뒷면을 결합한 방식은 보물 제1919호 ‘봉화 청량사 건칠약사여래좌상’처럼 신라~고려 초에 해당하는 비교적 이른 시기의 불상조각에서 확인되는 제작기법이어서 희랑대사좌상의 제작시기를 유추하는데 참고가 된다.

건칠기법이 적용된 희랑대사좌상은 육체의 굴곡과 피부 표현 등이 매우 자연스러워 조선 시대에 조성된 ‘여주 신륵사 조사상’(1636년), ‘영주 부석사 소조의상대사상’(조선 시대) 등 다른 조각상들과 달리 관념적이지 않고 사실적인 표현이 돋보인다. 마르고 아담한 등신대 체구, 인자한 눈빛과 미소가 엷게 퍼진 입술, 노쇠한 살갗 위로 드러난 골격 등은 매우 생동감이 넘쳐 생전의 모습을 연상하기에 충분하다.

희랑대사좌상의 또 다른 특징은 흉혈국인(가슴에 구멍이 있는 사람)이라는 그의 별칭을 상징하듯, 가슴에 작은 구멍(폭 0.5㎝, 길이 3.5㎝)이 뚫려 있는 것이다. 이 흉혈은 해인사 설화에 의해 희랑대사가 다른 스님들의 수행 정진을 돕기 위해 가슴에 작은 구멍을 뚫어 모기에게 피를 보시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고승의 흉혈이나 정혈(정수리에 난 구멍)은 보통 신통력을 상징하며, 유사한 모습을 ‘서울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좌상’(1024년, 보물 제1000호)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문화재청 측은 “우리나라에 문헌기록과 현존작이 모두 남아있는 조사상은 희랑대사좌상이 유일하다”며 “제작 당시의 현상이 잘 남아 있고 실존했던 고승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재현해 내면의 인품까지 표현한 점에서 예술 가치도 뛰어나다”고 설명했다.

또한 “후삼국 통일에 이바지했고 불교학 발전에 크게 공헌한 희랑대사라는 인물의 역사성과 시대성이 뚜렷한 제작기법 등을 종합해 볼 때, 이 조각상은 고려 초 10세기 우리나라 초상조각의 실체를 알려주는 매우 귀중한 작품”이라며 “희랑대사의 높은 정신세계를 조각예술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역사·예술·학술 가치가 탁월하다”고 밝혔다.

(서울=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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