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홀린 성악예술의 거장 루치아노 파바로티, 영화로 만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2월 18일 15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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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 하워드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파바로티’는 사운드트랙의 절반 이상이 자코모 푸치니(1858~1924)의 오페라 아리아들로 채워진다.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1935~2007)는 푸치니 오페라의 탁월한 해석자였지만, 영상으로 재구성한 그의 삶이 푸치니의 삶을 떠올리게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두 사람 모두 키가 컸고 친절했다. 우수(憂愁)와 댄디함이 앞섰던 푸치니와 비만한 몸에 양팔을 벌리며 천진하게 웃는 파바로티는 많이 달라 보인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여성들로 가득한 대가족 속에서 어려운 유년기를 보낸 뒤 세계인을 매혹하는 성악예술의 거장이 됐다.

여성에 대한 사랑에서 삶과 예술의 자극을 구한 점도 닮았다. 세계인 대부분은 파바로티가 오페라 스타로서의 삶 대부분을 함께 한 부인과, 비서 출신인 두 번째 부인만을 알고 있었다. 스포일러를 무릅쓰고 밝히면 오랜 관계를 유지했던 제3의 인물이 등장한다. ‘비서’도 사실은 비서가 아니었다.

영화는 전통적인 다큐멘터리의 정석에 충실하다. 의외성은 없다. 대신 이 흥미로운 예술가의 삶 자체가 화면에 빠져들 재미를 길어 올린다. 영국의 다이애나 왕세자빈부터 ‘동료’ 플라시도 도밍고와 호세 카레라스, 어릴 때 그의 방중 소식에 흥분했던 피아니스트 랑랑까지,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자료화면과 증언으로 스크린을 수놓는다.

1990년대 이후 오페라 무대를 멀리하며 록밴드 U2의 보노를 비롯한 대중음악가들과 무대를 가진 것은 오랜 팬들과 평론가들로부터 따가운 목소리를 불러왔다. 만년에 눈뜬 자선사업에의 공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감독은 파바로티 주변인들의 입장을 충실히 전한다. 다이애나빈을 비롯한 명사들과의 교류 및 만년의 새 사랑 니콜레타의 관심사가 그를 새로운 세계로 이끈 것이라고.

영화가 보여주지 않는 사실은 이랬을 것이다. 파바로티의 선택은 나름 영리했다. ‘당시의 파바로티’가 ‘과거의 파바로티’를 넘어서지 못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행동의 범위를 확장했던 것이다. 거의 마지막까지 그의 목소리는 햇살과 같이 따사롭고 찬란한 빛깔을 유지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를 제어하는 힘의 쇠퇴, 특히 호흡이 짧아져 반주자와 동료 성악가들이 템포를 맞춰줘야만 하는 일은 1990년 첫 쓰리테너 콘서트부터 명백했다.

기자는 예전 ‘쓰리 테너’를 ‘연인의 공식’으로 소개한 일이 있다. 파바로티는 밝고 또렷한 목소리로 낙천적인 분위기를 주위에 흩뿌렸다. 150㎏을 넘나드는 거구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팔을 벌려 인사하는 이 ‘순진한 곰’을 보며 관객들은 행복과 밝음의 이미지에 흠뻑 취하곤 했다. 도밍고는 많은 것을 알고 있거나 큰 재산을 소유한, ‘가진 자’의 이미지를 줄곧 풍겨왔다. 바리톤으로 출발한 그의 음성은 짙고 기름졌다. 힘 좋은 ‘젊은 장군’은 그의 단골 배역이었다.

창백하고 깡마른 카레라스는 온몸을 쥐어짜 노래한다는 느낌을 줬다. 가진 것 없지만 열정이 넘치는 남자, ‘시인’이 그를 감싸는 이미지다. 지적이고 진실해 보이는 표정이 그의 열정적인 노래에 한 겹의 빛을 더했다.

세 사람 중 파바로티는 현대에 출연한 모든 테너 가운데서도 가장 위대한 ‘악기’, 그의 발성기관을 자랑할 수 있었다. 전성기에는 그 악기를 연주하는 솜씨도 경탄의 대상이었다. ‘라이벌’이었던 도밍고는 ‘파바로티는 입만 벌리면 모든 소리를 다 냈다’고 영화에서 증언한다. 그러나 그 악기를 관리하는 솜씨는 파바로티가 도밍고보다 하수였다.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이자 오페라 무대의 단짝이었던 소프라노 미렐라 프레니가 한 마디도 들려주지 않은 점은 의아하다. 손녀의 출생과 함께 ‘옛 가족’과 ‘새 가족’이 화해한 점은 강조하지만, 사망 이후 유산 분배를 둘러싼 충돌은 언급하지 않는다. 문제들이 해소됐기 때문에 이 영화가 나온 것일까.

1977년, 그의 첫 내한 실황 방송을 녹음해 그해 겨울 내내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들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영화를 봤다. 헤어진 부인 아두아는 말미에 ‘그는 보통 사람보다 한 수 위였다. 잘 베풀었으며 특히 위대한 가수였다’고 남편을 회상한다. 그런 삶을 훑어보는 일이 행복했다. 함께 한 음악은 ‘덤’이라기엔 너무 아름다웠다. 12세 관람가. 2020년 1월 1일 개봉.

유윤종 문화전문기자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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