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석의 시간여행]한미일 야구 동맹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4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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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야구 인기

1920년대 경성(서울)에서의 야구 경기 모습.
1920년대 경성(서울)에서의 야구 경기 모습.
벚꽃이다 선거다 하는 사이 프로야구가 개막해 벌써 세 번째 주말을 지냈다. 야구 팬들에게는 벚꽃보다 설레고 선거보다 흥분되는 4월이 아닐 수 없다. 벚꽃과 선거는 일시적이고 단발적이지만 프로야구는 장기적이고 지속적이다. 이보다 더한 즐거움을 주는 것이 달리 있겠냐고 야구 팬들은 확신한다. 따라서 열광한다.

그때도 그랬다. 1929년 4월 19일 용산구장. 일본의 정예 직업야구단인 다카라즈카(寶塚) 팀의 서울 방문경기를 보기 위해 관중들이 신용산의 철도 그라운드를 가득 메웠다. 훗날 일본 프로야구의 전신이 되는 세미프로 구단이 경성의 실업야구연맹 소속 5개 팀을 상대로 벌이는 제1차전이었다. 첫 상대는 총독부 철도국 팀.

철도국의 선공으로 경기는 시작됐지만, 2시간여의 경기 끝에 철도국은 방문 팀에 5 대 7로 분패했다. 홈 팀이 졌다고 슬퍼할 팬들은 아니었다. 일본인 관중의 눈에는 둘 다 일본 팀이었다. 한국 팬들은 오히려 기뻐했다. 철도국 선수는 전원 일본인이었고, 방문 팀에는 손효준과 함용화가 소속되어 승리를 견인했기 때문이다.

4월 24일, 경성구장에서 속개된 나흘째 경기에서 경성부청 팀은 방문 팀에 한 점만 내주고 5 대 1로 완승, 서울의 자존심을 살렸다. 지금의 시청 격인 부청 팀에는 김정식 이경구 조점룡 등 3명의 한국인 선수가 출전했다.

그 밖에 체신국, 식산은행, 경성전기와의 접전이 25일까지 치러졌다. 이어 4월 28일, 경성실업야구연맹 춘계 리그전이 개막해 서울의 5개 팀은 6월 25일까지 27차전의 결전에 돌입했다.

‘경성전기, 경성부청, 식산은행, 세 팀이 시소의 접전을 연출하여 일진일퇴의 기세로 선두 다툼을 벌인 바, 이제 25일의 경성전기-식산은행 결승전으로 그 순위가 결판나게 되었다. 경전이 이기면 승률 7할로 수위에 오르고 지금까지 6할7분7리로 2위이던 식산이 3위로 떨어질 것이며, 식산이 이기면 7할로 우승, 경성전기는 6할3분6리로 경성부청과 2위 다툼을 다시 벌여야 할 초유의 대접전이 예상된다.’(동아일보 1929년 6월 25일자)

6월 25일의 대격전은 식산은행이 7 대 1로 완승함으로써 파란을 연출했다. 한국인 구심에 일본인 누심 2명으로 2시간 동안 경성운동장에서 진행된 결승전은 양 팀 전원 일본 선수였다.

‘식지 않은 피를 보려거던 야구장으로 오라!/마음껏 소리질러보고 싶은 자여, 달려오라!/6월의 태양이 끓어내리는 그라운드에/상록수와 같이 버티고 선 점(點)·점·점……/꿈틀거리는 그네들의 혈관 속에는/붉은 피가 쭉쭉 뻗어 흐른다.’

심훈이 그해 6월 10일에 쓴 것으로 되어 있는 ‘야구’라는 제목의 시 첫머리는 바로 경성그라운드 현장의 기록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4월부터 6월까지 봄은 야구와 더불어 지나갔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전국 규모의 대항전이 그 대미를 장식하는 빅 매치가 기다리고 있었다.

‘조선실업야구연맹 주최의 결승리그 전이 7월 6일부터 3일간 경성구장에서 거행된다. 출전 팀은 식산은행, 경성부청, 미쓰비시, 대구, 4팀.’(동아일보 1929년 7월 5일, 7일자)

식산은행의 투수진 3명 중에는 한국인 이영민이 포함되었다. 포수 조점룡이 2루타까지 날린 경성부청이 3전 3승으로 우승을 거두었다. 경성부청은 8월 3일부터 도쿄에서 14개 지역 팀이 겨루는 제3회 일본도시대항야구대회에 경성 대표로 출전해 준결승까지 올랐다.

대도시의 여름도 야구와 함께 지나갔다. 그리고 또 9월이 오기 바쁘게 추계리그가 시작되었다. 춘계와 추계의 결승전은 라디오로 실황 중계되었다. 87년 전의 풍경이다.

그로부터 시곗바늘을 다시 7년 전으로 돌리면 야구의 시조인 미국의 메이저리그 선수단이 경성에 들러 조선 대표팀과 경기를 벌이는 장면에 이르게 된다. 12월 7일 밤 경성에 도착해 다음 날 오후 용산 그라운드에서 조선 올스타 팀과 사상 첫 경기를 벌였다. 21 대 3, 미국 승이었다.

해를 넘겨 1923년 봄에 조선야구협회가 창립되었다. 그리고 1982년 봄 프로야구가 이 땅에서 개막되었다. 동대문야구장에서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시구로 개시된 프로야구는 처음에 ‘3S 정책’의 첨병으로 여겨져 반발을 받았으나 나머지 두 S와 더불어 대중적 인기를 누리며 오늘에 이르렀다. 일본보다 근 50년 늦고 미국보다야 한 세기도 지난 뒤에 출범했지만 한국의 프로야구는 미일을 계승하여 세계 프로야구의 주축 동맹, 즉 메이저 리그를 이루게 되었다.
 
박윤석 역사칼럼니스트·‘경성 모던타임스’ 저자
#한미일#야구동맹#192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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