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9·19공동성명 이끌어낸 前 미 대사의 협상법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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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힐 회고록:미국 외교의 최전선/크리스토퍼 힐 지음·이미숙 옮김/524쪽·2만2000원/메디치미디어

2005년 6자회담 9·19공동성명에 최종 합의하고 이를 발표하기 직전. 콘돌리자 라이스 당시 미국 국무장관은 6자회담 미국 측 수석대표였던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에게 전화를 걸었다. “(합의문 가운데) ‘북한과 미국의 평화공존’ 부분을 들어낼 수 있을까요.” 라이스는 ‘평화공존’이 냉전시대의 표현이니 삭제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힐은 누군가가 그녀를 밀어붙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신보수주의자(네오콘)들이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던 것.

6개국이 합의한 성명 문안을 수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힐은 “‘평화공존’이라는 표현을 ‘평화롭게 함께 존재한다’로 바꾸면 어떠냐”고 제안했다. 승인을 받자마자 휴대전화를 끈 힐은 중국 측 수석대표인 우다웨이(武大偉)에게 달려갔다. 우다웨이는 “지금 이 시점에 텍스트를 바꾸자는 말씀인가요?”라고 되물었다. 이에 ‘더 뛰어난 영어적 표현’이라고 설득한 뒤 몇 분 뒤에 합의를 발표했다.

미국의 강경한 북핵 대응을 비판하고 9·19공동성명을 탄생시킨 주역의 한 명인 힐이 북핵 협상을 비롯한 33년 외교관 생활을 총결산했다.

1980년대 이후 국제외교계의 굵직한 사건인 1995년 보스니아 내전 종식, 1999년 마케도니아 코소보 난민캠프 폭동 문제, 2005년 9·19공동성명을 만드는 현장에 그가 있었다. 그 생생한 기록들로 가득 채워졌다.

그는 2004년 9월 주한 미국대사로는 최초로 광주의 국립5·18민주묘역을 참배한 배경도 설명했다. 그가 대사로 부임한 시기는 ‘여중생 장갑차 사망사건’ ‘패트리엇 미사일 배치 및 미사일방어(MD) 체계 구축’ 문제 등으로 한국의 반미 감정이 고조되던 무렵이었다.

그는 “미국이 한때 한국 민주주의의 진전을 저지하는 데 일조했다는 인식이 확산되어 있었다”며 “광주를 방문해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다 스러진 분들에게 조의와 존경심을 표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가 북핵 문제를 해결하던 과정은 쉽지 않았다. 스스로 “내가 북한 차관보 같다”고 농담하던 그는 네오콘과 큰 갈등을 겪었다. 그럼에도 그가 잊지 않은 것은 협상을 통한 문제 해결이었다.

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크리스토퍼 힐#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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