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북카페]“정치인이 책 내면 TV서 최소 45분간 떠들 기회 얻는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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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뤼크 멜랑숑 극좌당 대표의 ‘비스마르크의 청어’ (왼쪽)와 알랭 쥐페 전 총리의 ‘학교로 가는 길’ 표지.
장뤼크 멜랑숑 극좌당 대표의 ‘비스마르크의 청어’ (왼쪽)와 알랭 쥐페 전 총리의 ‘학교로 가는 길’ 표지.
프랑스에서는 가을이 되면 ‘문학의 개학(Rentr´ee litt´eraire)’이란 이름으로 서점가에 책들이 쏟아진다. 올해도 589종이나 되는 책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한 해 최대의 출판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올해는 유난히 정치인들의 에세이들이 ‘문학의 개학’을 점령하고 있다. 2017년 대선과 2016년 주요 정당의 대선후보 경선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대선 출마를 준비하는 거물급 정치인들의 고백서나 정책공약, 논쟁거리를 담은 책이 25권이나 된다.

프랑스 일간 르몽드는 “정치인들이 9, 10월에 에세이를 발간하는 것은 강력한 상징적 가치를 담은 행위”라고 분석했다. 정치인들이 여름 바캉스 동안 조용한 곳에 머물며 사색하고, 성찰해서 자신의 사상과 이념체계를 다듬었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프랑스의 정치 전통에서 정치가들이 작가로서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은 매우 존중받는다. 필력이 좋은 정치인은 현명하고, 진지하고, 구조적인 사고를 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많은 정치인들이 책을 통해 정치에 데뷔하거나, 성공적으로 복귀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는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이다. 그는 1964년 발간한 ‘항구적인 쿠데타’에서 샤를 드골 당시 대통령이 헌법 개정, 국민투표 등의 끊임없는 쿠데타를 통해 장기집권을 획책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정치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올해 가장 잘 팔린 정치인의 책은 장뤼크 멜랑숑 극좌당 대표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독일을 신랄하게 비판한 ‘비스마르크의 청어(Le hareng de Bismarck)’다. 특유의 유려한 말솜씨와 화끈한 스타일로 독일을 비판한 이 책은 프랑스에서 3만5000부 이상 팔렸고, 현재 스페인에서도 번역돼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멜랑숑 대표는 최근 독일 폴크스바겐 배출 가스 조작 파문이 일자 “메르켈 여왕 폐하는 아무런 사과도 하지 않고 있다”며 “폴크스바겐 판매를 즉각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알랭 쥐페 전 총리는 차기 대선 출마를 앞두고 교육에 대한 정책공약을 담은 ‘학교로 가는 길’을 펴냈다. 그는 2016년 11월 후보 경선 전까지 4권의 정책 시리즈를 낼 계획이다. 그의 모델은 1990년대 책을 통해 자신의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주는 데 성공한 자크 시라크 전 대통령이다. 시라크 전 대통령은 1992년 ‘새로운 프랑스’와 1994년 ‘모두를 위한 프랑스’라는 책을 통해 사회적 단절을 극복하겠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했다.

프랑스에서 정치인들이 책을 출판하는 이유는 TV, 라디오, 신문을 통해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 때문이다. 정치인 출신의 출판인인 라르튀르 피에르 씨는 “책이 나오면 정치인은 미디어에서 최소 45분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며 “이는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인들의 책은 판매보다는 홍보용인 경우가 많다. 장크리스토프 캉바델리 사회당 사무총장은 여러 차례 신문과 라디오 인터뷰에 초대되고, 공영TV 토크쇼에서 45분 동안 떠들었지만 그가 쓴 ‘좌파에서는 가치관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겨우 278부 팔렸다. 대선 출마까지 해서 1%를 득표했던 크리스틴 부탱 전 주택장관은 ‘기독민주당이란 무엇인가?’를 발간해 38부 팔았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가 웃음거리가 되었다.

반면 정치권의 흑막에 대한 폭로가 담긴 회고록은 잘 팔린다.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의 전 동거녀 발레리 트리에르바일레르 씨의 ‘지금 이 순간을 감사해요’는 60만 부 이상이 팔려 2014년 소설 및 비소설 모든 분야를 합쳐서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

파리=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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