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사 설정스님 “내가 헛된것 좇았구나…방장 행자도 버거워”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24일 15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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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충남 예산군 수덕사의 능인선원 앞에는 부처가 그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보리수가 서 있다. 20m 이상 웃자란 키에 사방으로 뻗은 가지가 무성하다. 사연이 있다.

이 보리수는 덕숭총림(수덕사) 방장인 설정 스님(73)이 출가 이듬해인 1956년 다른 스님들과 심은 것이다. 6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홍안의 소년은 이제 덕숭총림의 최고 어른인 방장이 됐다. 총림(叢林)은 강원 율원 선원 등을 갖춘 큰 사찰을 가리킨다. “지혜롭고 고마운 나무죠. 그늘도 주고, 열매로는 염주를 만들 수 있고. 개인적 인연이 있어서인지 보리수 주변이 좋습니다.”

25일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스님을 만나러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견성암서 능인선원으로 이어지는 길이 너무 가팔라 차가 뒷걸음한 탓에 모골이 송연했다.

-요즘 농사일은 어떻습니까.
“감자와 채소 심고, 산중에서 사는 게 뭐 다른 게 있겠습니까.”

-농사 재미는 어떻습니까.
“아기를 다루는 것과 비슷하죠. 아기를 함부로 대하면 울고 싫어하는데, 채소와 꽃도 정성을 들인 만큼 커주죠. 자연은 그 자체로 인간에게 무한한 스승입니다.”

-독학으로 검정고시 마친 뒤 서울대 원예학과를 졸업하셨죠. 그 경험이 농사에 도움이 됩니까.
“이론적인 것은 조금요. 하지만 농사는 실전이예요.”

-‘사람 농사’는 어떻습니까.
“사람 농사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백년지대계죠. 불교계만 봐도 조선왕조 500년 척불과 일제강점기의 불교말살 정책 여파가 적지 않습니다. 비구와 대처의 갈등은 일단락됐지만 그 시기 제대로 교육하지 못한 후유증이 지금 나타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총무원장 자승 스님이 비구, 대처 갈등 속에 ‘스님들이 절 빼앗기 위해 다니느라 제대로 교육 받지 못했고, 중 정신도 부족하다’고 토로했는데요.
“스님에게는 승격(僧格)이 필요해요. 승격은 철저한 출가정신을 바탕으로 자비와 지혜가 어우러질 때 가능하죠. 제대로 못 갖췄는데 남에게 영향을 주니 문제가 생기는 거죠.”

-덕숭총림의 가풍은 어떤가요.
“생각만 하기보다는 옮기는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죠. 불같은 신심과 흐르는 강물 같은 원력이 있어야죠. 머리 깎고 중 된 자는 개인이 아니라, 부처의 제자이자 모든 중생의 것이라는 각오로 살아야죠.”

-취임 당시 ‘방장 행자’로 살겠다고 했습니다.
“마음은 그런데 항상 부족해요. 위로는 부처님 은혜를 갚고, 아래로는 남들에게 퍼줘도 끝이 없는 능력자가 되기를 기도하는데 모자람만 절감해요.”

-종단 내에 스님을 따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더 큰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다 부질 없어요. 1998년 췌장암으로 수술 받고 투병하면서 ‘내가 헛된 것들을 좇았다’는 걸 절감했어요. 방장 행자도 버거운 데 다른 것에 욕심내겠습니까. 하하.”

-최근 여야와 노사, 남북 등 다양한 갈등과 대립이 우리 사회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정치를 잘 모르지만 ‘무신불립(無信不立)’, 믿음이 없으면 바르게 설 수 없어요. 무엇보다 여야 정치인을 포함한 사회 지도층의 뼈아픈 반성이 필요합니다. 권력과 돈, 능력 있다고 해서 축재하고, 자식 군대 안 보내면 되나요? 힘이 없어 억울하다는 민초(民草)들의 불만이 팽배해지면 사회가 불안해져요. 그런 정서와 아픔을 읽고 어루만져야 합니다.”

-부처님오신날의 의미를 되새긴다면.
“부처님이 위대한 것은 자신만 깨우친 것이 아니라 그 행복을 모든 생명들과 나누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위한 조언을 부탁합니다.
“어려울 때는 용기야말로 우리 삶을 지탱해주는 원천입니다. 가난, 시련을 극복하거나 유혹을 벗어나기 위해서도, 칠전팔기를 위해서도 용기가 필요해요. 행복은 그냥 열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열정과 정성, 노력과 신념, 피와 땀으로 쌓는 과정입니다. 행복은 성실한 나무에 피는 아름다운 꽃이죠.”

평소 좋아하는 구절을 청하자 설정 스님은 ‘처염상정(處染常淨)’이라고 썼다. “독일에서 작곡가 윤이상 선생의 49재를 진행하면서 고인의 묘비에 쓴 구절입니다. ‘뻘’에 있어도 항상 깨끗함을 유지하는 연꽃의 삶과 지혜가 요즘 세상에 필요합니다.”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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