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진출 1세대 배우 오순택 교수의 연기강좌 뜨거운 열기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0월 25일 03시 00분


대사-시선-동작 하나하나 칼날같은 지적

7년차 이상 배우를 대상으로 한 연기 교육 도중 오순택 서울예대 석좌교수(오른쪽)가 실습 과제로 셰익스피어 ‘말은 말로, 되는 되로’의 한 장면을 연기한 문현진(왼쪽에서 두 번째), 김은정 씨에게 조언하고 있다. 오 교수는 연기에서 가장 중요한 점으로 ‘정직’을 꼽았다. 정직만이 관객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7년차 이상 배우를 대상으로 한 연기 교육 도중 오순택 서울예대 석좌교수(오른쪽)가 실습 과제로 셰익스피어 ‘말은 말로, 되는 되로’의 한 장면을 연기한 문현진(왼쪽에서 두 번째), 김은정 씨에게 조언하고 있다. 오 교수는 연기에서 가장 중요한 점으로 ‘정직’을 꼽았다. 정직만이 관객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22일 오전 서울 대학로의 ‘대학로연습실’. 셰익스피어 희곡 ‘리처드 3세’의 한 장면을 재연하는 리허설이 한창이었다. 1막 2장 중 헨리 6세의 장례행렬에서 며느리 앤 부인이 시아버지를 애도하기 위해 잠시 관을 내려놓으라고 말하는 부분. 앤 부인 역할은 극단12언어연구소의 연극 ‘정물화’에 출연 중인 7년차 배우 서미영 씨(30)가 맡았다.

하지만 극은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 리허설은 서울연극센터가 7년차 이상 배우들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오순택 교수의 장면연기 실습’ 중 조별발표 과제. 강사인 오순택 씨(79)는 배우의 대사의 정확성에서부터 시선과 움직임 어느 것 하나 대충 넘기는 법이 없었다.

“내려놓으세요, 내려놓으세요.”(서미영)

“왜 내려놓으라고, 두 번 얘기하지? 서서 노래하는 것도 아닌데?”, “그건 누구에게 하는 얘기인가? 정면을 보고 얘기하면 (관을 든 사람들은) 어쩌라는 것인가?”, “왜 하필 여기서 (관을) 내려놓으라고 하지? 대본에 그렇게 있으니까?”….

오 씨의 지적은 한 장면에서도 대여섯 차례씩 이어졌다. 그때마다 서 씨를 비롯한 배우들은 마음을 다잡고 처음부터 다시 해야 했다. 이런 지적들이 베테랑 배우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낼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배우들의 눈빛은 초롱초롱했다.

오전 11시에 시작한 발표는 마치기로 예정된 오후 2시를 넘기고도 1시간이 지나서야 끝났지만 이날 발표를 해야 할 세 조 가운데 한 조는 발표를 못해 다음 주로 미뤘다.

오 씨의 실습은 서울연극센터가 배우들의 능력과 전문성을 향상시킨다는 취지로 7월부터 시작해 12월까지 진행 중인 ‘연극인 재교육 프로그램’의 일환. 각 과정마다 10명 안팎의 정원으로 ‘체호프 연기 워크숍’, ‘해외연출가 워크숍’을 마쳤고 11월부터 ‘연극인의 심리 치유 및 명상 훈련’도 예정되어 있다.

특히 오 씨의 장면연기 실습 과정에는 정원 14명이 넘쳐 청강자도 7명이나 된다. 연기 지도 분야에선 국내 최고로 꼽는 오순택 서울예대 석좌교수의 강의라는 점도 크지만 그만큼 배우들의 배움의 갈증도 컸던 것이다. 이 과정은 지난달 3일 시작해 다음 달 12일까지 매주 한 번 총 10회 진행한다.

‘1동 28번지 차숙이네’와 ‘해무’에 출연한 배우 김용준 씨(42)는 “20년 가까이 무대에 섰지만 새 작품에 출연할 때마다 ‘내가 이 역할에 접근하는 방식이 옳은 것인가’를 고민한다. 30년 이상 연기자로 경험을 쌓고 연기 철학을 세운 분께 나의 방식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연극원 출신인 서미영 씨는 “오 선생님이 한예종 전문사(대학원) 과정에서 연기를 가르치실 때 명강의로 소문이 자자했지만 학부생이어서 수강하지 못했다”면서 “특히 배우의 시각에서 연기 지도를 해주기 때문에 더 와 닿는다”고 말했다.

1970년대 초 미국 TV 시리즈 ‘쿵후’에 출연한 오순택 씨. 오순택 씨 제공
1970년대 초 미국 TV 시리즈 ‘쿵후’에 출연한 오순택 씨. 오순택 씨 제공
오 씨는 할리우드 진출 1세대 한국 배우다. 연기에 관해 이론과 현장 경험을 두루 갖춘, 국내엔 드문 ‘최고의 연기 지도자’로 꼽힌다. 그는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1959년 미국으로 건너가 그레고리 펙, 스티브 매퀸, 톰 크루즈를 배출한 뉴욕의 명문 연기학교 ‘네이버후드 플레이하우스’를 졸업했고, 연기와 극작 전공으로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에서 실기석사(MFA)를 받았다. 배우로는 1965년 CBS방송의 ‘앨리윈터의 마지막 전쟁’으로 데뷔한 뒤 30여 년간 미국 TV 드라마와 영화 120여 편, 뮤지컬 포함 300여 편의 연극에 출연했다. 2001년 귀국해 한예종에서 잠시 학생들의 연기를 지도한다는 계획이었는데 이것이 이제 10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한국 배우들은 대단한 재능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체계적인 교육 없이 경험과 끼만 갖고는 항상 제자리걸음입니다. 그런 안타까움 때문에 제가 한국을 못 떠납니다.”

김성규 기자 kimsk@donga.com
#연극#재교육#오순택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